(시론)의전이 무너지면 굴욕외교다

입력 : 2021-04-08 오전 6:00:00
외교는 의전에서 시작해서 의전으로 끝난다. 외교무대에서 정해진 의전이 무너지면 '파격'이 아니라 '국격'이 손상된다. 상대의 무례한 의전을 수용하게 되면 굴욕외교라거나 저자세외교라는 비판이 뒤따르게 된다. 그만큼 의전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3일 중국 푸젠성 샤먼(廈門)에 가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장과 한중 외교장관회담을 가졌다. 다자간 국제회의가 아닌 한중 외교장관 단독회담을 양국의 수도나 양국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 연 것은 이례적이다. 아마도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정 장관 취임 직후 왕이 부장이 방한해서 상견례를 겸한 양국 외교장관회담을 한 바 있기 때문에 한 달여 만에 굳이 양국 외교장관이 상하이(上海)에서도 한참이나 먼 샤먼까지 가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의아했다. 외교수장은 국가 간 외교관계에서 의전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회담 개최장소 역시 의전 프로토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샤먼은 최근 중국과 대만정부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최전선으로 미·중 양국이 신경전을 벌이면서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특히 1958년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서 금문도(金門島)를 포격할 때 전초기지였다. 외교장관회담이 열린 호텔 주변 바닷가에 '일국양제 통일중국'(一國兩制 統一中國)이란 선전구호를 세워 둘 정도로 중국이 잔뜩 신경을 쓰는 곳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이 한국 외교부 장관을 이런 상징적 의미가 있는 샤먼에 불러 회담을 한 것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외교장관회담은 교차 개최하는 것이 의전의 기본이며, 개최국이 상대국을 배려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중국이 한국을 배려하고 의전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이번 외교장관회담은 절대로 샤먼에서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베이징이나 최소한 우리 정부의 양해를 얻어 상하이에서 열자고 제의했다면 우리 정부가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식이 됐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외교장관회담이 열리기 직전에 우이산이 있는 푸젠성 난핑(南平)에서 동남아국가들과 릴레이 행사를 하고 있으니 한국 외교부 장관에게 푸젠성으로 오라고 하자 정 장관이 냉큼 달려간 격이 됐다. 대국이 부르니 소국이 응해야 하는 것인가. '국격을 손상시킨 대중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어설픈 외교장관회담이었다.

오히려 외교부는 "왕이 부장이 난핑에서 400㎞ 떨어진 샤먼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억지 설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말은 중국 측이 난핑으로 오라고 했는데 우리가 우겨서 샤먼에서 회담을 했다는 것인가. 만일 우리 정부가 샤먼에서 하자고 했다면 정말 난센스다. 난핑과 샤먼이 아닌 상하이에서 상호합의 아래 회담을 하는 게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이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양국을 오가는 항공편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베이징을 봉쇄한 중국을 이해한다면 상하이에서 회담을 여는 것이 옳다. 중국이 굳이 샤먼을 고집한 것은 미국과 중국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한국을 중국 편에 서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국은 중국의 의도를 알면서도 굴욕적으로 샤먼회담을 수용한 셈이다. 아니면 우리 정부도 중국 편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은연 중에 담았거나 말이다.

외교장관회담 발표문에서 긴급한 현안이나 두드러지는 합의사항은 없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거듭 요청한 우리 정부의 입장이나 코로나19 백신 관련 협력 등은 늘 논의하던 의제였지 않은가. 이번 샤먼회담으로 인해 우리 정부의 친중 성향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대중 외교자세는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오르게 됐다. 직항도 없는 그 먼 샤먼까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외교부장관이 대국의 칙사를 알현하러 가는 모양새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이 부장은 우리 측 발표문에 없는 '한국 사드철수'를 다시 한번 강력하게 요구했다고도 한다.

한번 의전을 지키지 않으면 외교관계는 와르르 무너진다. 상호주의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무너진다는 말이다. 왕이 부장이 지난해 방한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 박병석 국회의장과 여당 대표 등 여권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총출동하다시피 줄을 섰다. 반면 우리 고위 인사가 중국을 방문하면 그런 대접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문 대통령의 2017년 첫 방중 과정에서 불거진 '혼밥' 논란과 기자단 폭행사건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중국 측의 무례와 우리 측의 대중 저자세는 이 정부 들어 지속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구도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겠다는 자주외교를 주장하기 이전에 무너진 의전부터 바로 세우지 않으면 호구 잡힌 '동네북' 되기에 십상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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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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