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보낸사람: IDONTBELIVEANTIFREEZE@102.com
받는사람: TheBlackSkirts@201.com
날짜: 2021.4. 20. 오후 3:36
안녕하세요. 환승이별 당한 ‘코로나 이별자’ IDONTBELIVEANTIFREEZE입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건 술병과 흰 머리, 무수한 밤들 뿐입니다.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편지를 보내봅니다. 곡들에 관한 한 줄의 설명이라도 들으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어서요. 저 무척 내성적이지만 그래도 용기내 마음 전해봅니다. 곡별 제가 느낀 감정들을 아래에 별도 첨부해봤습니다.
술 사주며 위로 해주시는 셈 치고 곡에 얽힌 사연도 좋고, 사운드적으로 설명해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럼 회신기다겠습니다.
첨부파일
Good Luck To You, Girl Scout! 감상평.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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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사람: TheBlackSkirts@201.com
받는사람: IDONTBELIVEANTIFREEZE@102.com
날짜: 2021. 5. 2. 오후 7:23
#1.Kleenex
IDONTBELIVEANTIFREEZE: 반짝이는 신스음, 미니멀한 악기 구성이 이번 앨범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곡 같습니다. 80년대 신스음 같은 반짝임들로 이뤄진 선율들이 몽환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지게도 하고, 또 중간에는 급작스레 청하 ‘X’에서처럼 목소리가 유령처럼 뒤틀리는 사운드를 넣은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곡에서 화자는 짧은 문자만 남기고 떠난 화자를 정말 사랑해서, 아직 못 잊는 것 같아 마음이 덩달아 아프더군요.
TheBlackSkirts: 2013년 곡으로, 이번 앨범에서 유일하게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노래에요. 기존의 데모 버전은 지금도 제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라가 있는데, 사실 저는 그 버전이 더 좋아요. 이건 그냥 이번 EP의 인트로를 담당해 줬으면 하는 느낌으로 편곡했어요. 곡이 시작하면서 나오는 피아노 인트로는, 녹음 도중 트랙을 옮기다가 잘못해서 생긴 에러에요. 첨엔 귀찮아서 그냥 뒀는데 결국엔 정이 들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이틀
IDONTBELIVEANTIFREEZE: 코로나 이별자로서 느끼는 것은, 이틀 뒤가 가장 비현실적인 느낌이더군요. 이제는 시간이 지나 덤덤하지만 가사를 보고는 무너져 내리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전체적으로 슬로우 템포인 곡은 눈물의 강처럼 흘러가는 것 같네요. 후반부 신스음과 어우러며 반복되는 구슬픈 기타 스트로크는 정말이지 망령들이 출몰하는 유령의 집처럼 공허한 느낌이네요.
TheBlackSkirts: 타이틀곡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신경을 가장 많이 썼어요. 개인적으로도 마지막 후렴에 나오는 Theremin(유령소리)이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해요. 힘든 일이 있으면 고전영화 라던가, 에피소드 많은 미드를 하나 골라 며칠 동안 침대에서만 생활하는데, 가사에서처럼 하루 만에 시즌 하나를 다 끝낸 적은 아직 없어요. Sharp Objects, Channel Zero (series), The Haunting of Hill House 를 몰아서 보긴 했었죠.
#3.걸스카우트
IDONTBELIVEANTIFREEZE: 도입부 실제 걸스카우트의 빈티지한 송으로 시작해, 신스음으로이어지는 투명한 선율은, ‘노스탤지어’를 일렁입니다. ‘영원’일 것 같던 지나간 내 시간들은 부질없게도 느껴집니다. 투명한 선율에 자꾸만 과거를 미화하는 내 자신도 힘겹네요. 저는 그래도 그 사람의 행운을 빌어야 할까요.
TheBlackSkirts: ‘새로운 친구들을 만드네. 하지만 옛 친구도 친구지. 하나는 은이고 하나는 금이야. 원은 둥글고 끝이 없어. 그만큼 오랫동안 난 너의 친구로 남아있을 거야’ 곡 시작과 함께 나오는 인트로의 번역 가사에요. 구전되는 걸스카우트의 캠프파이어 송 같은 건데, 가사가 이 앨범의 주제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앨범의 맥락에서 보면 ‘난 널 영원히 어장에 안에 풀어둔 채, 친구로만 둘 거야’라고 하는 것 같잖아요. 금과 은이 있다면, 아마 내가 은이겠죠.
#4.When I Think Of You
IDONTBELIVEANTIFREEZE: 노래에서 아련한 풍낭이 불어오네요. 난파할 듯 여린 서정은 기타 줄 하나에 매달려 불안하게 항해하는 듯합니다. “서로 닮은 점이 신기하다”던 너는, “우린 너무도 다르다”며 떠났습니다. 나의 일부로 존재하던 그 상대가 이젠 남이란 게 우습네요. 헤어진 직후에는 남이 다른 남을 만날 것 이란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나저나, 어떤 어쿠스틱(혹은 클래식) 기타로 연주하면 이렇게 봄 같은 소리가 나나요. 조용하고 느린 이 공기의 흐름은 끝내 저에게도 꽃을 피우고 씨앗을 틔울까요.
TheBlackSkirts:앨범에 실린 노래는 녹음실에서 마이크 레벨을 조정하는 동안 연습 삼아 녹음한 첫 번째 테이크에요. 그날따라 녹음실 안이 이상하게 더웠거든요. 작은 공간이라서 산소가 부족했는지,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졸리더라고요. 거짓말이 아니고 2분밖에 안되는 노래를 부르면서 중간에 몇 번을 졸았는지 모르겠어요. 음악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어봐서 나중에 다시 녹음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해봤는데, 결국엔 이 버전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자면서 불러서 그런지 음정은 조금 아쉽더라고요.
#5.Heavy Rain
IDONTBELIVEANTIFREEZE: 헤어지고 2~3달 뒤 다짜고짜 떠났습니다. 모두가 타인인 그곳에서 나를 생각했습니다. 이 여름이 지나기 전, 어딘가로 떠나면 뭐라도 바뀔 것만 같았습니다. 제 눈에 맺힐 눈물을 하늘이 대신 알았는지, 길거리가 침수될 정도의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피아노의 타건이 비처럼 뚝뚝 떨어지는 이 음악에 잠시 그 때를 생각하며 몸을 기대봅니다.
TheBlackSkirts :이것도 원래 ‘When I Think Of You’처럼 단출한 기타 곡이었는데 뭔가 더 해보고 싶어서 피아노 편곡으로 바꿨어요. 지금은 기타 느낌이 더 좋았던 것 같아서 살짝 후회됩니다. 녹음보다도 오히려 맘에 드는 빗소리를 찾기까지가 시간이 더 걸렸어요.
#6.Plain Jane
IDONTBELIVEANTIFREEZE: 사실은 이 곡의 화자가 조금은 부럽더군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로맨티스트라 자부했지만, 지나간 사랑은 돌아보면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살랑이는 포크 감성의 선율에 섞여진 마지막 문장이 제 공명을 울립니다. ‘다시는 그런 사랑 안할 것 같아요.’
TheBlackSkirts: 이 곡에서는 tongue 드럼이라는 악기를 사용했어요.(사실 악기라기보다는 싸구려 장난감에 가까워요). 재작년 블랙 프라이데이 때 집사람이 인터넷으로 충동구매를 했는데, 알고 보니 먹튀로 유명한 외국의 사기성 웹사이트였던 거예요. 그래서 그냥 돈만 날렸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기적처럼 네 달 만에 배송이 왔습니다. 주소도 없고 어디서 온지도 모르겠어요. 얘는 이 노래에 사용됨으로써 이미 운명의 역할을 다했다고 봐야죠.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