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어떤 이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새벽 서울로7017 아래로 보이는 서울역 방향 표시. 사진/금반지레코드
새벽이면 서울로7017 초입에 들어서곤 했다. 주머니에는 고민 한 조각이 구겨져 있었다.
마지막 발길이 머무는 곳은 주로 서울역 맥도날드 앞. 어스름에 실려 오는 기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생각의 파도가 밀려왔다. 코로나 이후 끊겨버린 지방 공연과 주변 상황에 관한 단상들.
“늘 고민의 매듭을 못 짓고 집으로 향했지만요...”
지난달 29일 서울역 인근. 싱어송라이터 정밀아가 가사를 쓰듯 말했다. 음악에서 느껴지던 차분하고 깊이감 있는 어조로.
이날 서울로7017에서 만난 우린 “사운드를 채집한 곳”이라는 문화역서울284(구서울역) 인근을 지나며 다시 ‘우리의 오늘’을 마주했다. 서울역 철길과 잿빛 도시를 가로지르는 차량들, 노숙 시설을 둘러싼 종교 단체를 굽어보며.
“제가 보고 듣는 것이 음악에 묻어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죠. 창작자들은 ‘레이더’를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싱어송라이터 정밀아는 3집 '청파소나타' 작업 당시 거의 매일 산책을 했다. 29일 서울로7017을 걷다 다다른 문화역서울284 앞에서 그는 선별진료소와 노숙 시설 등의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올해 ‘제 18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3집 ‘청파소나타’로 총 3개의 트로피를 안은 그다.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 상까지 받을 것이라곤 자신도 상상 못했다.
‘청파소나타’는 청파로-서울역 일대를 거닐며 녹음한 도시 소리를 포크 사운드에 겹쳐낸 작품. 도시 소음을 음악의 일부로 쓰게 된 건, 코로나19 여파로 음반 작업과 동네 산책에 몰두하면서다. 그는 “내 주변, 내 상황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게 됐다”고 했다.
“인류의 모든 상황이 뒤엎어진 세상에서 창작자로서 일종의 절박함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좋은 쪽으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내 시간이 모두 끊겨버릴 것 같았어요. ‘내가 할 것은 음악뿐이니 차라리 잘됐다’ 그렇게 결론을 냈죠.”
정밀아 3집 '청파소나타'. 사진/금반지레코드
앨범은 첫 곡 ‘서시’의 도입부터 새벽의 공명감을 짙게 드리운다. 정밀아가 직접 채집한 새와 차량의 소리에 어스름한 하늘의 채도가 눈앞에 그려지듯....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따온 가사는 ‘오늘의 나를 살 것이라’는 신념에 대한 축약이자 은유다.
앨범 각 수록곡에는 산책자적 시각으로 그려낸 정밀아의 ‘오늘’이 걸려 있다.
뮤트 피킹의 박자세기로 뒤따르는 곡 ‘서울역에서 출발’은 과거의 기억들을 오늘의 정밀아에 겹쳐낸다.
경북 포항에서 미술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스무살 시절과 음악가로의 전향. ‘매개 공간’ 서울역은 과거 기억들을 여행하듯 돌고 돌아 지금의 그를 비춘다.
실제로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화가가 꿈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뒤 10년간 동네 미술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2012년 뒤늦게 독학으로 배운 기타로 본격 음악 세계에 뛰어들었다.
“제 노래는 ‘내 인생이 말이야’ 하는 의미는 아니에요. ‘내가 이런 시간에 살았는데 이런 일들이 있었다’ 하고 담담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에 가깝죠.”
싱어송라이터 정밀아가 산책 당시 직접 찍은 청파로 골목 계단. 사진/금반지레코드
재개발지역에서 도시재생구역으로 바뀐 이 동네는 돌면 돌수록 신묘한 구석이 있었다. 한국 전쟁 때 시체를 쌓아뒀다는 가파른 계단들과 빌라 반지하의 수많은 봉제공장들, 정치·종교적 확성기 소리들.... ‘청파(靑坡-푸른언덕)’란 예쁜 이름 뒤, 보이지 않던 상흔들이 있었다.
곡 ‘광장’은 서울역광장-시청광장-광화문 일대를 걷다 쓴 노래다. 데모 녹음 시 바깥의 온갖 소리들이 담겨 애를 먹던 찰나. “이것 또한 지금 나의 환경”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제 ‘광장’의 앞 구절 ‘확성기 소리’는 잠결에 집 앞 서울역 인근으로 뛰쳐나가 채집한 소리다.
비교적 밝은 멜로디를 구현동화식으로 풀어낸 곡 ‘환란일기’는 오늘날 코로나 상황을 연상시키는 지점도 있다.
‘거리는 비어가고/ 냉장고도 비어가고/ 우리 만나 손을 잡고 안지도 못해 (중략) 멈추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항상 한발 늦은 깨달음/ 이렇게 많은 걸 잃고/ 겨우 조금을 배우고’
사회에 밀착해 소묘를 그리는 정밀아의 노래는 시대성을 획득한다.
“슬퍼서도 기뻐서도 안되는 온도의 노래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들이 코로나 같은 사회적 재난에 대해 기쁘고 슬프고 어떻게 규정하겠어요. 그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기록하고 환기시킬 수 있는 역할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싱어송라이터 정밀아. 사진/금반지레코드
앨범에서 나일론 기타줄의 진동과 함께 악기 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목소리다. 잔잔하고 차분하되, 한편으론 명료하고 또렷한 목소리는 바람을 가르듯 앞서 간다. 귀에 가사를 확확 꽂히게 하는 역설의 효과를 낸다.
그는 “가사를 잘 들리게 하는 효과가 목소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악기 사운드와 나름의 밸런스를 맞추려 하곤 한다”고 했다. “목소리 빈 사이사이 손맛이 묻어나는 연주도 저는 너무 좋거든요.”
잿빛 도시에서 그가 끝없이 갈구하는 장소는 ‘바다’다. 안개 같은 목소리와 기타줄 진동 사이사이 파고드는 드럼의 브러쉬는 밀물 썰물이 흩트리는 모래알처럼 서걱댄다.(곡 ‘바다’) 끝내 첼로의 풍성한 울림이 꿈결 같은 음의 파도를 드리운다.
“바다가 주는 평안함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는 그는 “그곳에 서면 모든 이들은 수평이 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게 된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했던 사람이든, 그런 것은 바다 앞에 서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요. 넓고 푸른, 변화무쌍하면서도 말이 없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다만 그는 이번 앨범을 “어떤 관문이나 절차를 통과해야 다다르는 여행지처럼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함께 앉아 있던 앞 쪽의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 아래 서 있을 수 있는, 그저 현실 안에 있는 그런 음악이었으면 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저의 노래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싱어송라이터 정밀아는 3집 '청파소나타' 작업 당시 거의 매일 산책을 했다. '서울역-시청광장-광화문-서대문' 코스, '청파로-아현동-홍대' 코스, '서울로7017 초입부터 남대문시장 방향 또는 남산소월길에서 이태원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주로 돌았다. 산책 도중 중림동 방향을 가리키며 그는 "저 동네도 팔 곳이 많더라"며 웃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