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외국서 자란 아동 여권 이름, 외국 표기대로" 첫 판결

입력 : 2021-08-31 오전 7:00:00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외국에서 태어나 7살이 될 때까지 현지식 이름을 써왔다면, 정부가 여권상 로마자 이름 역시 그에 맞게 바꿔줘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강우찬)는 7살 A군 부모가 외교부를 상대로 낸 '여권 영문 성명 변경 거부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외교부의 여권 로마자 성명 변경 거부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고 31일 밝혔다. 여권법 개정 시행령 이후 나온 첫 판결이다.
 
재판부는 "원고가 태어나 지금까지 평생 동안 불리고 쓰던 이름을 계속 쓸 수 없게 된다면 사회생활상 불편과 어려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아직 나이가 어린 아동인 원고는 그 성장과정에서 많든 적든 어느정도의 정신적 혼란을 겪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A군은 지난 2014년 7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살고 있다. A군 부모는 프랑스에 아들의 출생을 신고하면서 로마자 성명을 'OOOO, SOOOOO JOOOOO'로 표기했다. 그해 9월 첫 여권 신청 때도 로마자 성명을 똑같이 적었다. A군 이름 초성은 'ㅅ' 다음에 'ㅎ'이 들어가지만, 부모는 불어에서 H가 묵음이어서 이를 뺀 이름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반면 외교부 여권 발급을 대행한 서울시 종로구청은 이 표기가 로마자 표기법에 어긋난다며 H가 들어간 'OOOO, SOOOOO, SOOOHOO'로 발급했다.
 
이에 A군 부모는 2019년 8월 외교부에 여권 로마자 성명을 프랑스 출생 증명서상 로마자 성명대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외교부는 H가 들어간 로마자 이름 변경은 여권법 시행령에 따른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신청을 거부했다.
 
A군 부모는 그해 11월 외교부 처분 취소를 구하는 행정심판을 청구했지만,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지난해 6월 기각재결했다.
 
A군 부모는 아들이 초등학교 진학과 전학, 공항 이용 등 생황에 큰 불편을 겪었고, 지금은 벨기에에서 같은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여권법 시행령상 '국외에서 여권의 로마자 성명과 다른 로마자 성명을 취업이나 유학 등을 이유로 장기간 사용한 경우'에 해당하므로 외교부 처분은 위법하다는 주장을 폈다.
 
외교부는 A군의 현지 이름이 일관되게 장기간 사용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여권 기재 로마자 성명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적힌 법적 성명을 음역대로 표기해야 함에도 H를 빼는 건 여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여권 대외 신뢰도를 위해 로마자 이름 변경이 신중해야 하고, 'SOOOHOO'에 '국외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이름 SOOOOO JOOOOO'를 병기하거나 한글 이름을 해당 음역에 맞게 개명하면 된다는 논리를 폈다.
 
재판부는 A군이 프랑스에서 태어나 공립초등학교 학적부에 H 없는 이름을 등록했고, 5년 넘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등 여권법상 취업이나 유학을 이유로 장기간 사용하려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봤다.
 
헌법과 유엔 아동인권협약도 판단 근거였다. 재판부는 헌법이 국민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여자·노인·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 우대 허용, 국가정책 결정에서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고려할 의무를 고려할 의무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가입해 1991년 12월부터 발효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3조도 꺼냈다. 협약은 당사국이 아동 복지를 위해 모든 적절한 입법적·행정적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재판부는 "원고처럼 나이가 어린 아동이 여권상 영문명으로 인해 겪게 되는 생활상 불편함은, 자기결정능력이 없는 원고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완고하게 경직되어 있던 여권법 규정과 그에 따라 적절히 권리구제를 받아 줄 수 없었던 부모의 상황과 제도적 불합리에 기인한 것이므로, 그 불이익이 결코 특별한 보호의 대상인 아동에게 돌아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행정법원. 사진/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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