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11도, 증폭 음향으로 그려낸 ‘꿈의 항해’

팝적인 안료 섞은 한국형 슈게이즈
꿈 쫒는 소년 화자, 서사적 앨범 구성
데뷔 EP ‘Dive into Sea’

입력 : 2021-09-23 오후 12: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11도 데뷔 EP ‘Dive into Sea’. 사진/미러볼뮤직
 
증폭된 음향들이 굽이치는 맥놀이로 한 폭의 푸른 유화를 그려낸다.
 
활질을 하는 기타와 수십대 이펙터로 일으키는 공간계 음의 잔향들, 스네어와 탐의 후주 폭격세례....
 
망망대해. 꿈을 부여잡고 떠나는 청춘들의 항해가 부서질 듯 아름답다. 
 
“세상이 넓은 바다라면 우린 둥둥 떠다니는 하나의 쪽배 같은 것이랄까요. 방황, 상처, 몸부림, 그럼에도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김강산)
 
최근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지하 스튜디오에서 데뷔 EP ‘Dive into Sea’를 발표한 밴드 11도(11Degrees) 멤버들, 김강산(보컬 기타), 허지예(베이스), 홍준기(드럼), 이윤우(기타)가 말했다.
 
2014년 스무살 무렵 만나 2018년부터 정식 밴드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최근 팝적인 ‘슈게이즈(shoegaze)’ 앨범으로 음악계 출사표를 던졌다.
 
슈게이즈는 기타 이펙트로 생성하는 잡음과 안개 같은 보컬의 음성이 뒤범벅되는 특징을 지닌 록의 하위 장르. 주로 라이브 무대에서 ‘바닥 혹은 신발만 쳐다보며(gazing at their shoes)’ 거칠게 연주한다는 데서 표현이 유래됐다. 광의로는 무기력한 무대 매너로 일관한 1980, 90년대 서구 밴드의 태도, 문화까지도 포괄한다.
 
밴드 11도, 허지예(베이스), 김강산(보컬 기타), 홍준기(드럼), 이윤우(기타). 사진/밴드 11도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이 발달하면서 MZ세대 음악가들 중심으로 슈게이즈 열풍이 불고 있다. ‘파란노을’, ‘포그’ 등이 음악 전문 매체 피치포크를 비롯해 미국, 호주, 브라질 슈게이즈 전문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면서 한국식 ‘슈게이즈’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 발전하는 모양새다.
 
11도는 슬로우다이브나 라이드, 마이블러디발렌타인 같은 정통 슈게이즈를 단순히 재해석하는 것에서 나아가, 팝 사운드를 안료로 더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질감의 슈게이즈 사운드를 그려낸다.
 
“어떤 슈게이징 앨범을 내놓는다 해도 마이블러디발렌타인이나 슬로우다이브 같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는 어렵지 않나요. 우리만의 차별점이 뭘까 고민했고, 그게 팝적 멜로디라 생각했어요.”(김강산)
 
신보 ‘Dive into Sea’는 꿈을 쫒는 한 소년을 화자로 세워, 한편의 영화처럼 흘러간다.
 
겹겹이 쌓아올린 소리 풍경은 눈앞에 파도를 드리울 듯 입체적이다. 내면 감정 진폭을 투영한 듯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공간계(리버브, 딜레이) 사운드, 말렛 스틱으로 물방울 구르듯 부드럽게 두드리는 라이드와 시즐의 리듬 새김, 찢어질 듯(퍼즈) 뭉개지고 마는(디스토션) 잔향 범벅과 이를 뚫고나오는 미성의 보컬....
 
밴드 11도가 활용하는 기타, 베이스 이펙터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꿈의 항해에 나선 소년의 심경을 넓은 음의 풍경으로 채색하는 첫 곡(‘Dive into Sea’)을 지나면, 내밀한 감정의 잔물결들이 음표로 일렁인다. 상처 입은 화자의 모습이 물에 투영되고(‘파도’), 슬픔과 절망에 허우적대다 깊은 물속으로 침잠(‘해구’)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꿈 같은 세계로 빠져든다.(‘Realize’) 
 
꿈속에서 화자는 다시 꿈을 부여잡는다.(‘Eye of Typhoon’, ‘Outro’) 바다를 그리던 음의 풍경은 후반 우주로 확장된다. ‘Outro’ 도입부 통통 튀기는 하모닉스가 교신음처럼 들린다. 말미 라디오 핑크 노이즈를 삽입해 열린 결말의 느낌도 줬다. 
 
“우주 어딘가에 우리가, 우리의 음악이 닿기를 바라는 희망의 시그널입니다. 꿈을 잘 잡았다면 그 노이즈는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출발점,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열정의 임종을 뜻하는 소리지 않을까요? 희망일지 절망일지는 미래의 우리가 더 잘 알겠죠.”(김강산)
 
밴드 11도(11Degrees) 멤버들, 허지예(베이스), 홍준기(드럼), 김강산(보컬 기타), 이윤우(기타). 사진/밴드 11도
 
그간 뜸했던 한국 슈게이즈가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다. 우울한 정서, 루저 감성이 코로나로 물든 지금의 시대성을 자극하고 있다. “음악은 결국 시대의 반영이잖아요. 코로나 장기화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이나 무력감을 느끼는데 그런 측면도 일정정도 슈게이즈 재유행을 촉발했다고 생각해요.”(홍준기)
 
다만 이들은 슈게이즈 사운드에만 자신들을 한정하려 하지 않는다. 김강산은 “다음 앨범은 브릿팝 사운드가 될 것”이라 했다. 넬부터 뮤즈, U2, 지미 헨드릭스, 폴아웃보이, 린킨파크, 핑크 플로이드, 너바나, 라디오헤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영양처럼 흡수해왔다. 기타리스트 이윤우는 미국풍 블루스 계열의 음악도 즐겨 연주한다.
 
마지막으로 멤버들에게 데뷔 앨범을 특정 공간으로 표현해 달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바다 자체가 여행지일 것 같네요, 정처 없이 커다란 배를 타고 드넓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뜻 깊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이윤우)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이번 밴드유랑은 코로나19로 대중음악 공연장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밴드신과 공연장을 조명하고자 경기콘텐츠진흥원과 특별 기획한 인터뷰입니다. 지니뮤직 매거진 내 ‘경기뮤직’ 카테고리에 연재되는 코너에서는 재편집한 글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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