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1998년 남성 전관 넷으로 출발한 로펌이 23년만에 특별한 기록을 세웠다. '공채 출신·여성 경영담당 대표변호사 선출'이다. 주요 로펌 첫 사례라고 한다. 지난 2000년 법무법인 바른 공채 1기로 입사한 이영희 파트너 변호사는 남성·전관의 벽을 넘어 최고경영자에 올라섰다.
이 변호사는 경영담당 대표에 유임된 이동훈 변호사와 함께 내년부터 3년간 박재필 차기 총괄대표 변호사를 보좌한다. 지난 21년간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이 변호사에게 경영에 대한 포부와 여성 변호사의 고민·해법을 13일 물어봤다.
새 시대, 새 출발선에 서다
차기 경영담당 대표가 내다본 2022년 바른은 새로운 출발선 위에 있다. 이 변호사는 "블록체인이나 가상화폐 거래소,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예전에 생각 못한 분야의 법률자문·분쟁이 늘고 있다"며 "기존에 송무로 다져진 실력 위에서 무한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무한한 노력 중 하나가 '조화'다. 이 변호사는 전관과 비전관 변호사, 특정 업무에서 뛰어난 변호사들을 한 팀으로 묶어 시너지를 내는 경영 감각을 자신한다.
이 변호사는 "법률 지식에서 최고인 분, 의뢰인과 소통 잘 하는 분, 협상 잘하는 분이 모여 증거 산출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며 "각각의 장점을 가진 분들을 환상의 드림팀으로 만들어 사건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21년 근속의 이점을 살려 다양한 변호사의 장점을 최대로 끌어올리겠다는 이야기다.
법무법인 바른의 차기 경영담당 대표 변호사가 13일 서울 강남에 있는 바른빌딩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바른 문화'가 키워낸 공채 1호 이영희
남초에 전관 중심이던 2000년 법조계에서 택한 신생 로펌행은 훗날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 변호사는 사법 연수원 졸업반 시절 교수들 추천으로 바른에 지원했다. 입사하고 보니 조중한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정귀호 전 대법관 등 기라성 같은 전관 선배로 가득했다. 신입 여성 변호사가 주요 경력을 쌓을 기회는 흔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듬해 '이용호 게이트' 수사를 위한 차정일 특검팀 수사관 참여 기회가 왔다. 이 변호사는 "신생 로펌에 어쏘(소속 변호사)는 여자 두 명이었다"며 "그 상태로 특검에 가면 인력 손실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때 이 변호사의 특검행을 강권한 사람이 정 전 대법관이었다. 파트너(구성원 변호사)들이 3개월만 불편을 감수하면, 이 변호사의 성장에 도움이 되니 보내자고 했다. 이 변호사는 "그 경험이 지금까지의 성장에 가장 큰 경험이었다"며 "특검팀에서 만난 분들의 업무 방식과 세상의 움직임이 제가 알던 표면적인 모습과 많이 달랐다"고 돌아봤다.
후배의 성장을 위해 선배가 당장의 아쉬움을 감내하는 문화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변호사들에게 어떤 기회를 줘야 성장할 수 있는지 (선배들이) 상당히 고민하고, 괜찮은 기회라면 많이 주는 분위기"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18년 출간된 '스무살 바른'에서 바른이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가', '미래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가'라는 요건을 모두 갖췄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 변호사는 "사건과 의뢰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공감하는 능력도 많이 배웠다"며 "겉멋과 거리가 멀고 사건 기록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선배들, 혼이 난 후배에게 밥 사주며 격려하는 문화"라고 말했다.
이영희 변호사. 사진/이범종 기자
의뢰인 공감과 성과가 또다른 수임으로
역경도 많았다. 몇 해전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에서 패소한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 변호사는 지금도 의뢰인이 남편의 공격을 방어하다 무의식적으로 흉기가 닿았다고 믿는다. 수많은 전문가 의견을 들었고 재연 동영상도 만들었다. 검사와 재판부가 이런 노력에 경의를 표했지만 유죄가 선고됐다. 의뢰인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에서 징역 10년, 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이 변호사는 지금도 의뢰인의 무죄를 믿고 있다.
여성 후배들의 사건 수임 고민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공감과 적극적인 소통, 검사도 인정할 만한 노력이다. 육아와 가사 부담을 가진 여성 변호사들은 저녁 술자리를 통한 수임이 상대적으로 어렵다.
이 변호사는 "일을 잘 해줘서 의뢰인에게 얻는 신뢰에 무게 두는 편이 낫다"며 "의뢰인과 도시락을 먹으며 여섯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는데, 의뢰인 스스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쟁점이 나온다"고 조언했다.
이어 "사건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사자"라며 "당사자 이야기를 최대한 듣는 것이 좋은 결과를 이끄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가사·육아 부담은 여전하다. 전관·비전관의 조화처럼, 여성 변호사의 지혜와 회사의 지원도 시너지가 필요하다. 이 변호사는 "유능한 여성 변호사의 이탈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수임 부담 없는 파트너 변호사 제도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