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두 청년은 12년 전 연남동 한 건물 지하를 상기했다. 햇살 한 줌도 들어오지 않던 공간, 맥북과 빈티지 신디사이저, 입문용 인터페이스 더미들이 마네킹과 함께 나뒹굴던 때.
“시각·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다 음악을 본격 업으로 삼던 시기였어요. 두 달 동안 음악 작업한다고 살다시피 했는데, 나오면 옷들이 곰팡이로 누렇게 피어있었죠. 그래도 그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없겠죠?”
세계 록스타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개러지(차고)의 낭만’도 실상은 이런 눅눅한 기억일지 모른다. 처음 스쿨 밴드로 만나,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갖고 놀다 팀을 꾸리게 됐다는 이야기는 기원부터 ‘한국의 다프트 펑크’다.
글렌체크 1집 앨범 녹음 당시 12년 전 연남동 한 건물 지하 공간. 사진=글렌체크
최근 9년 만에 정규 3집 ‘블리치(Bleach)’로 돌아온 일렉트로닉 듀오 글렌체크를 15일 서울 마포구의 음반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촉촉한 웨트 헤어로 깔끔한 인상을 풍기며 기자를 맞은 두 멤버, 김준원(보컬·기타), 강혁준(신시사이저·베이스)은 “초심으로 돌아가려 했다”고 했다.
그 초심이란 표백을 뜻하는 이 앨범 제목처럼 머릿 속 고민을 지우고 가슴을 따라가는 것. 해보고 싶은 것을 마냥 해보는 것.
2011년 데뷔 직후 한국대중음악상 댄스&일렉트로닉 앨범부문 연속 수상(2013년 1집 ‘오트 쿠튀르’, 2014년 2집 ‘YOUTH!’) 이후 주변의 기대가 부담으로 다가오며 생각의 골이 깊었었다고.
“이것저것 따져보는 생각과 고민은 분명 좋은 도구예요. 효율적일 수도 있고.” “근데 돌아보니 그게 우리 앞길을 막고 있더라고요.”(글렌체크)
글렌체크 두 멤버, 강혁준(신시사이저·베이스)과 김준원(보컬·기타). 사진=EMA
앨범 초반부 수록된 ‘Dazed & Confused’는 프렌치 하우스, 신스팝 스타일의 초기작들 악곡에, 최근 유행하는 PB R&B 스타일의 가창법, 철컥거리는 기타 이펙터를 조화시켜 트랜디한 느낌을 준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를 주물러 내는 싱그럽고 천진한 전자음 선율이 청춘, 꿈 같은 단어들과 몽롱하게 겹쳐져, 라이언 맥긴리 사진 같은 인상을 준다.
“청춘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이유도 초심과 닿아있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물리적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자율성의 개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김준원)
다른 수록곡 ‘Dive baby dive’에서는 전주 이후 벌스(Verse)부터 펜더 재규어로 연주한 거칠고 묵직한 질감들이 낮게 깔린다. 다이노서 주니어, 소닉 유스 같은 90년대 얼터너티브 록풍 사운드. 라디오헤드나 픽시스 같은 세계적인 밴드들의 믹싱 과정도 참고했다.
“록 명반들을 보면 저음과 중음, 고음을 전체적으로 펼쳐 풍성한 느낌을 주더라고요. 드럼, 베이스, 기타 등 악기끼리 소리들을 엮고 이를 아날로그 아웃코드 컴프레서에 투과하니 사운드가 전체적으로 쫀득쫀득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김준원)
최근 9년 만에 정규 3집 ‘블리치(Bleach)’로 돌아온 일렉트로닉 듀오 글렌체크. 사진=EMA
전체적으로 장르 활용을 전작들보다 넓게 했다. ‘Sometimes You Gotta Shake(이하 Sometimes)’는 펜더 재즈마스터로 90년대 슈게이징 기타톤을 연구하다 만든 40초짜리 실험적인 연주곡이다. 일반적인 코드 형식을 탈피하는 신디 연주가 돋보이는 ‘Long Strange Days Pt.2’는 스코틀랜드 일렉트로닉 듀오 ‘볼즈오브캐나다(Boards of Canada)’의 실험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다. 록과 전자음악을 다시 팝 형식으로 투과한 이 앨범을 이들은 ‘얼터너티브 팝’이라 명명한다.
성서 속 7대 죄악(교만, 시기, 분노 등)이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관을 신작의 시각화와 연결시킨 것도 흥미롭다. 올해 초부터 7대 죄악을 7777개의 대체불가토큰(NFT)으로 발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111의 NFT가 팔려 나가면 다음 단계의 NFT가 새롭게 열리는 구조로, 공연 입장권 등 리워드를 주는 방식의 신선한 프로모션을 전개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공연이 중단되면서 앨범 전곡의 영상화도 추진하고 있다.
“시각적인 팝 컬처를 보여줘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애초 곡을 만들 때 사이버 펑크 네온 색감이나 고스적인 비주얼(‘Sins’), 스케이트보드나 비보이(‘Sometimes’) 같은 이미지들이 여럿 떠올랐어요. NFT처럼 다양한 미디어와 결합해 소통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고 조금 생소하지만 재밌어요.”(강혁준)
앨범 커버에 토끼 캐릭터를 로켓처럼 박아놓은 것도 흥미롭다. 벨벳언더그라운드의 바나나 음반 커버처럼 피사체 하나를 정 가운데 두는 것이 상징적일 것 같아서였다고.
“무언가를 할 때 점점 이해득실을 찾고 ‘생각의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이 앨범은 그런 ‘독’에 빠지지 말고 마음을 따라 가보라는 저희의 경험담이에요.”(김준원)
일렉트로닉 듀오 글렌체크 정규 3집 ‘블리치(Bleach)’ 음반 커버. 사진=EMA
멤버들은 끝으로 각각 특정 공간에 앨범을 빗대주었다.
“듣는 사람들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집이 됐든 방이 됐든, 일과 끝나고 가장 생각을 많이 하는 공간에서 오히려 내려놓는 과정을 겪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김준원)
“저는 오히려 세계 여행 느낌? 1집과 2집 모두 유럽을 다녀와서 만든 앨범들이었어요. 이번 앨범은 특정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만든 것이라, 다양한 시공간에서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강혁준)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