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쯤이었을 게다. 재테크 월간지 창간을 준비하느라 한창이던 어느 날, 대표님이 어디 좀 같이 가자시기에 따라 나섰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은행연합회 꼭대기층 뱅커스클럽엔 내가 만들 잡지의 편집위원들이 모여 계셨다. 무슨 박사님, 어디 교수님, 대표님, 소장님… 각계의 내로라하는 분들을 편집위원으로 위촉해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테이블 말단에 앉아 오고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이내 부자에 대한 정의가 대화의 주제로 떠올랐다.
대표님은 ‘얼마를 갖고 있어야 부자인가?’를 놓고 참석자들에게 돌아가며 질문했다. 예상은 했지만 대중없었다. 100억원이라는 분도 있고 50억이란 답도 있고, 아마 20억원이 가장 적은 금액이었던 것 같다.
“그래, 김 기자는 얼마가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하나?” 마지막으로 대표님은 내게 물었다. 질문과 답이 오가는 사이 생각한 바 있었기에 바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이 모여 계시다 보니 금액대가 높은 것 같다”고 밑밥을 깔고 “저는, 그리고 우리 잡지를 보게 될 주 독자층은 월급 받아 열심히 저축하고 투자해도 현실적으로 수십억 자산을 만들 수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거다. 그래서 서울 강남 아파트든 지방 소도시에서 살든 자기가 사는 집 한 채는 빼고 그 나머지 자산이 종류와 상관없이 10억 정도 된다면 부자라고 생각한다. 10억원이면 평범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일 것이다. 또 옛날 백만장자 개념을 백만 달러로 바꾸면 얼추 들어맞기도 한다. 이렇게 눈높이를 잡고 잡지를 만들 생각이다”라고 답했다.
오오~ 일리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의 10억원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을까? 어쩐지 부자와는 거리가 먼 금액 같다. 하기야 서울에 집 한 채만 있어도 10억원이 넘는데 10억원 갖고 무슨 부자 운운할 수 있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억원은 여전히 만만하게 볼 금액이 아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 300인 이상 사업체의 대졸 신입 근로자 초임은 평균 5084만원이었다. 올해 발표될 2021년 초임은 이보다 많겠지만, 아무튼 이 정도를 대졸 초임으로 잡고 따져보자. 이들이 별다른 투자 없이 10억원을 모으려면 한 푼 쓰지 않고 20년 가까이 저축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른살에 입사해 예순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직장생활의 3분의 2를 계속 모으기만 해야 만들 수 있는 돈이란 뜻이다.
물론 그 사이 급여가 오르겠지만 연봉 인상액보다는 그동안에 쓰는 생활비, 교육비 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최근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데이터에 기초해서 발행한 ‘2022 대한민국 상위 1%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상위 1% 가구의 순자산은 29억2010만원이었다. 2020년의 26억1000만원보다 12%나 늘었지만 2022년을 사는 지금 부채 빼고 순수하게 30억원이 있다면 공식적으로 부자라는 말이다.
투자 커뮤니티 같은 곳엔 종종 ‘얼마를 갖고 있어야 부자인가요?’라는 질문이 올라온다. 댓글을 보면 100억원이란 답이 많다. 현실과 동떨어진 숫자가 나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투자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일반인들보다 자산이 많을 확률이 높고, 다른 한편으론 회원들의 눈높이엔 커뮤니티 내 오피니언 리더 이른바 자산가들의 수준이 반영돼 덩달아 올라가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온갖 원자재 가격이 뛰는 바람에 나라들마다 치솟는 물가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자산보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은 눈높이 상승률 같다는 생각을 한다.
10억원이 있다면, 여전히 당신은 부자다. 눈높이만 살짝 조절하면 충분히.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