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2일 당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열린 '북한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8차 정치국회의'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박주용 기자] 북한이 코로나19 확산에 비상체제로 전환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으로 마스크를 쓴 채 정치국 회의장에 입장한 장면은 이번 사태의 파장과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도·시·군에 대한 봉쇄 조처가 내려지는 등 북한은 비상방역체제에 돌입했다. 전문가들은 백신 등 인도적 지원으로 북한과의 대화의 물꼬를 틀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북한은 최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세를 대외에 공표했다. 지난 12일 북한 내 첫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진자 발생 사례를 공개한 데 이어 13일에는 18만7800명이 격리됐고 6명이 숨지는 등 감염 상황과 피해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동안 코로나 청정지역임을 주장해온 것과는 대비된다. 여기에 김정은 위원장이 처음으로 마스크를 쓴 모습도 포착됐다. 김 위원장은 12일 새벽부터 당 정치국 회의를 열어 코로나19 첫 확진자 발생을 공식 인정하며 '최대 비상방역체계'를 선언했다. 또 국가비상방역사령부를 찾아 방역체계 허점도 신랄하게 지적했다.
북한이 이처럼 코로나19 상황을 대외 공개한 것은 한미 등 국제사회를 향해 백신 지원 등 보건방역 협력에 관한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백신 지원 등)국제사회에 도와달라는 것"이라며 "그동안 북한은 코로나 '0'라고 해서 했는데 이렇게 1만8000여명이나 확진자가 나오다 보니 겁나는 것이다. 그간 관리할 수 있다 생각하고, 끝까지 코로나19 청정국 이미지로 버텼는데 다급해졌다"고 진단했다. 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의 협조 없이는 코로나19 극복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이를 대내외에 공개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13일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을 공식화한 북한에 백신과 의약품 지원 방침을 밝혔다. 구체적인 지원 방안은 북한 측과 협의해야 하며, 현재로서는 해열제와 진통제, 마스크, 진단키트 등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백신 지원 등 보건방역 협력을 시작으로 남북·북미 간 대화 재개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나온다. 실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백신이 아닌 미국의 모더나와 화이자 백신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에 백신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상황에서, 북한이 1차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수용할지 여부가 관건이다. 미국의 지원은 수용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지원에는 선을 긋는 이중적 태도도 배제할 수 없다.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조선중앙TV가 지난달 26일 보도했다. 사진은 열병식에 등장한 북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의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북한이 한미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수용하더라도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무력시위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 실험하는 것은 미국이 언제 자신들을 칠지 모르기 때문에 대비를 한다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며 "코로나 발생 문제는 북한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언제든지 (국제사회의)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상반되는 일이지만 국제사회도 인도주의적 문제 앞에서는 고려를 다 한다"고 했다. 정 전 장관은 이와 함께 "미국 등 국제사회는 북한에 지원을 하면서 '이제 핵 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으려고 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도 "북한에서 오미크론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해서 북한이 제7차 핵실험이나 미사일 시험발사 등을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오미크론 확진자 발생으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북한 지도부는 오히려 핵실험이나 미사일 시험발사로 주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다만 북한의 코로나19 확산 규모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까지 심각해질 경우 동요하는 민심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은 코로나 극복과 핵무력 강화는 별개라는 분리 전략을 쓰고 있지만, 코로나19 관련해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자연스럽게 한국이나 미국, 국제기구에 협력을 요청할 것이고 핵무력 강화보다 백신 협력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양 교수는 "핵 실험까지 하고 난 뒤에 백신 협력에 집중할 것인지, 핵 실험을 하기 전에 할 것인지는 북한의 판단에 달려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비핵화 문제와 별개로 백신 지원 등 인도적인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성장 북한연구센터장은 "남북 방역협력이 성사된다면 남북 군사적 긴장 완화와 대화 재개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남북 방역협력이 이뤄지면 그것을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과 화상상봉을 재개하는 계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주용 기자 rukao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