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은 기자] 정권교체 이후 첫 금융권 최고경영자(CEO) 교체 시기를 맞이하면서 국민연금이 발언권을 키우고 있습니다. CEO 연임을 방조하는 지배구조를 손보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소유분산기업을 겨냥해 "투명한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며 정부의 방향성을 명백히 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의 용퇴 결단과 손병환 NH농협금융 회장의 사퇴 등 일련의 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배구조 타깃은 여타 소유분산기업으로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CEO 교체 시기에 놓인
KT(030200)도 냉가슴만 앓는 형국입니다. 민영화 21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연임 의사를 밝힌 구현모 KT 대표에 대해 국민연금이 공개 반대에 나섰습니다. 정치권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KT 이사회로부터 적격심사를 받고 차기 CEO 후보로 뽑혔지만, '연임=지배구조 리스크'라는 잣대에 갇혔습니다. 디지털플랫폼기업(디지코) 전환으로 실적 증가와 시가총액 10조원 등 경영성과를 내고 있는 KT가 관치의 논란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구현모 KT 대표. (사진=KT)
투명한 지배구조 명분 내세워 외풍 반복
구현모 KT 대표는 지난해 11월8일 연임 도전을 공식화했습니다. 같은 달 16일 회사의 인공지능(AI) 발전전략을 소개하는 간담회 자리에 참석해 "(지금까지 이룬 변화가)아직은 구조적이거나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고 판단이 안 돼 연임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구현모 대표의 연임 의사 발표 한 달 후부터 국민연금은 소유분산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스튜어십코드를 강화해야 한다며 KT CEO 연임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스튜어십코드는 주요 기관 투자자가 주식을 보유한 기업의 의사 결정에 참여해 투명한 경영을 유도하고자 하는 자율 지침을 뜻합니다. 국민연금은 KT CEO 후보자 선임이 합리적 기준과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구현모 대표가 자본시장법상 제재를 받은 이력이 있고, 재임시절 서비스 장애가 발생한 것을 오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이 지배구조 문제 개선을 위해 CEO 선임과 연임 절차를 엄격하게 감시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도 30일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주인이 없는, 소유가 분산된 기업들은 공익에 기여했던 기업들인 만큼 정부의 경영 관여가 적절하지 않으나, 공정하고 투명한 거버넌스를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민연금의 최근 행보는 정부를 대신해 낸 목소리로 읽힙니다. 재계 관계자는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를 명분으로 사실상 국민연금이 정부를 대신해 CEO 선임에 개입하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KT는 민영화 이후 5번의 CEO가 부임했습니다. CEO 교체시마다 정권과 가까운 인물이 자리에 올라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번에도 해묵은 과제처럼 논란이 반복되는 셈입니다.
국민연금 의결권 있다지만…57.36% 소액주주 대변할 수 있을까
소유분산기업의 수장으로서 받는 질타를 뒤로 하고, 지난 3년간의 경영성과를 살펴봤을 때 구현모 대표는 숫자로 역량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변화에 뒤처졌던 통신공룡 KT를 디지코(DIGICO, 디지털 플랫폼 기업)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KT스튜디오지니를 필두로 미디어 사업 역량을 키운 것은 대표적 성과로 꼽힙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같은 히트작도 냈습니다. 오리지널콘텐츠 제작부터 플랫폼·채널 유통, 지적재산권(IP)확보 등 미디어 수직계열화로 성장 발판도 마련했습니다. AI·빅데이터·클라우드 기술을 기반으로 기업의 디지털 전환(DX)을 돕는 B2B 서비스로 분야를 넓혀온 것도 공으로 평가됩니다.
숫자로도 결과는 확인됩니다. 구 대표 취임 전인 2019년 KT 연간 영업이익은 1조1595억원이었지만, 2021년 1조6718억원으로 44.2%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1조7328억원을 기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기업의 체질 개선 결과로 주가도 9년 만에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취임 당일인 2020년 3월30일 당시 1만9700원이었던 주가는 지난해 8월10일 장중 3만9300원까지 오르며 시총 10조원을 돌파한 바 있습니다.
KT의 최대주주는 국민연금입니다. 지난 17일 기준 국민연금은 KT 주식 2597만4822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분율은 9.95%입니다. 다만 3월 열리는 주주총회 의결권과 관련한 국민연금의 주식수는 이보다 조금 높습니다. 주주 명부 폐쇄일인 지난해 12월31일 기준 국민연금은 KT 주식의 10.12%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국민연금의 권리이자 역할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57.36%를 차지하고 있는 소액주주 비중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주주들이 실적과 주가, 기업의 미래 가치 등을 중요시 생각합니다. 이는 CEO 선임 등 회사의 주요 방향이 국민연금 의결권에 의해 결정돼서는 안 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김형석 한국ESG연구원 정책연구본부장은 "소유분산기업의 견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소액주주 권리가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소유분산기업 지배구조 방향성은 이사회 역할에서 찾아야"
이번 기회에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를 바로 잡기 위해 방향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치적 목적의 기관투자자들의 목소리를 키우기보다 소유분산기업엔 주인이 없다는 인식을 버리고, 소액주주와 사외이사의 감독기능이 강화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소액주주도 기업의 주인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편, 사외이사들에 힘을 실어 독립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정치·정책적 목적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는 필요한 측면도 있다"면서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는데, 국내는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지은 기자 jieune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