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조재훈 기자] 미국의 '반도체법' 세부 지침 발표가 이르면 이달 중 나오는 것으로 알려지며 국내 반도체업계에 비상등이 켜졌습니다. 미국 반도체법은 자국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한 보조금 지원 확대와 함께 기업 현지 유치가 목적입니다. 문제는 '가드레일' 조항인데요. 미국 정부로부터 혜택을 제공 받으면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 등 미국 안보를 위협하는 국가에 투자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죠.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 정부로부터 세액공제나 보조금을 지원받은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 첨단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추가 투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는 국내 업체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입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중국 현지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미국 정부가 반도체법의 수위를 한단계 높일 것이라는 전망도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심상치 않아서인데요. 결국 국내 업체들은 미중 분쟁으로 인해 노후화가 필연인 현지 공장을 계속 돌릴 지, 국내 또는 제3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길 지 정해야하는 중대 기로 앞에 섰습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이달 중 자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제정한 '반도체 산업육성법(반도체법)'에 따른 계약 기준 등을 담은 세부 요건을 발표합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 역시 오는 23일 워싱턴 DC에서 법 시행 계획 관련 미 행정부 입장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반도체법은 미국이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키우기 위해 지난해 8월 발효한 법입니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 기업에 향후 5년간 527억 달러(약 76조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며 10년간 240억 달러(약 30조4000억원) 규모의 25% 세액공제도 지원합니다. 앞서 미국 행정부는 지난해 10월 중국의 첨단 반도체 군사적 이용을 막기 위해 18㎚(나노)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 이하 로직칩 등을 현지 생산하는 기업에 수출 통제 조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양사 모두 중국 생산 비중 40% 이상…'발등의 불'
중국에 대규모 생산 공장(팹)을 유지중인 국내 업체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입니다. 먼저 삼성전자 중국 시안 공장은 낸드플래시 전체 생산량의 20~30%를 차지하는 초대형 공장입니다. 충칭에서도 후공정을 위한 공장을 가동중인데요. SK하이닉스도 중국 다롄 공장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생산량의 40%에 육박합니다. 우시에 위치한 D램 공장의 SK하이닉스 총 생산량의 절반에 달합니다. SK하이닉스 역시 충칭에 후공정 공장을 두고 있습니다.
양사는 중국공장 운영 방침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면서 미-중 분쟁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가 반도체 장비 통제 1년 유예안을 발표하면서 한숨돌린 상황이지만 올해 10월 해당 기간이 종료됩니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해 컨콜에서 "라이센스(중국 장비 반입) 유예 조치가 연장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메모리 산업의 특성상 EUV 이슈가 2020년대 후반보다 훨씬 더 빠른 시점에 공장 운영에 어려움을 줄 것으로 본다"라며 "우시를 포함해 중국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공장을 매각하거나 장비를 한국으로 가져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데 매우 극단적인 이런 상황이 오지 않고 공장을 운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도 지난달 열린 2022년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시안 팹 운영 관련해서는 당사가 중국에 팹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며 "이미 많은 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SK하이닉스 중국 우시 공장. (사진=SK하이닉스)
미국 혹은 제3국 가능성…국내 유턴도 관심사
전문가들은 이들의 주요 생산 거점이 결국 중국에서 국내, 미국으로 옮겨갈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2024년 가동 목표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총 150억달러 규모로 미국에 반도체 후공정 전초기지와 연구개발(R&D) 센터를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미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일단은 1년 유예를 받은 것도 있긴 하지만 8개월 뒤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구형 공정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최신 공정을 할 수 있는 장비를 반입할 수 없다는 부담도 있고 미국의 규제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언제 더 강화된 지침이 나올 지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중국 투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황용식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 미국에서 추진되고 있는 반도체법으로 인해 국내 기업들이 중국과 '디커플링(decoupling)' 해야하는 그런 상황이 온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지 공장의 탈중국 여부 등 빠른 의사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양사는 미국 요직을 핵심 인력으로 구성하는 등 미국 정부와의 접점 높이기에도 나섰습니다. 지난해 2월 삼성전자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북미법인 대외협력팀장 겸 부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마크 리퍼트 부사장은 지난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당시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 일정을 수행했는데요.
또 권혁우 전 산업통상자원부 미주통상과장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대관 상무로 영입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대관 업무 조직을 강화했습니다. SK그룹은 지난해 말 유정준 SK E&S 부회장이 10년간 맡아왔던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신설된 북미 대외협력 총괄 부회장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각에서는 국내 유턴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국내에도 대규모 반도체 공장 증설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는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P4 공장 증설에 착수했으며 SK하이닉스는 본사가 있는 이천과 청주를 잇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황용식 교수는 "국내에 이들 기업의 대규모 공장 부지 확보가 이뤄지고 있어 중국 공장의 국내 이전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조재훈 기자 cjh125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