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2023년은 친환경 보조금 차별과 미중 갈등을 중심으로, 글로벌 무역공조가 약화되고 공급망 패권을 쥐기 위한 보호주의가 더 심해졌습니다. 러시아, 이스라엘 전쟁 속에 고금리·고물가·수요부진 3중고가 누르면서 국내 반도체 업황은 바닥을 찍었고 전기차 활황은 둔화됐습니다. 국내 조선, 항공, 해운업의 인수합병(M&A)이 진행되며 산업구조조정도 이뤄졌습니다. 강력한 보호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참여와 끝나지 않는 전쟁 등 반도체 업황이 바닥 통과한 것만 빼면 내년에도 비슷한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길어진 전쟁…짙어진 패권 경쟁
27일 산업계에 따르면 각국은 보복관세와 무역마찰을 피해가고자 친환경 보조금을 로컬기업에 우대하는 형태로 보호주의를 활용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었습니다. 초기 미국 내 생산시설을 짓기만 하면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예고돼 국내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이 모두 현지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이들은 금리 인상에 이자비용 상승 등 유동성이 부족해지는 형편에서도 어렵게 투자금을 짜냈습니다.
그런데 보조금을 로컬기업에만 지급해야 한다는 미국 의회 발언이 거세지면서 약속은 미궁에 빠졌습니다. 불확실성이 심해져 국내 기업들도 미국 현지 투자를 늦추는 형국입니다. 미중 갈등에서 비롯된 IRA는 중국을 견제하면서 중국과 공조해온 한국도 유탄을 맞게 됐습니다. IRA 수혜 품목으로 인지됐던 삼성, LG, SK의 국산 배터리도 중국산 재료를 쓰고 합작투자를 하는 것을 이유로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될 잠재적 불안에 노출됐습니다. 내년 미국 대선 전후 누가 어떤 공약을 내세울지, 누가 당선될지가 모두 밀접한 변수입니다.
유럽도 ESG공급망실사 등 친환경 보조금을 로컬기업에 지급하는 쪽으로 추진 중입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럽도 과거 중국 제조업 파상공세에 로컬산업이 무너진 전철을 밟지 말자는 기조입니다. 본래 무역관세조치는 국제무역법상 분쟁을, 상대국의 보복관세로 무역마찰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조금도 차별 지급이 금지돼 왔지만 친환경 분야에 한해선 예외를 인정하는 양상입니다. 그래서 각국의 친환경 산업 발전과 병행해 ‘녹색보조금’의 차별 지급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주로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이었으나 중국과 제조업 가치사슬을 분담해온 한국도 새우등이 터지는 격입니다.
거시경제 침체 속 AI만 빛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마저 발발하면서 고물가와 경기침체는 더 무거워졌습니다. 물가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이 연중 내내 이어졌습니다. 전쟁통에도 혹독한 금리에 물가는 겨우 잡힐 듯 했지만 파나마 운하의 예멘 반군 사태가 터져 해상운임이 또 오르고 있습니다. 이전 국제적 물류대란과 반도체칩 부족 사태 등 공급망 차질을 야기했던 바로 그 이슈입니다.
HMM으로서는 사상최고 실적을 냈던 반사이익에 다시 근접했습니다. 운임비 하락과 거시경제 불안 속에 HMM 매각 추진을 서둘렀던 산업은행은 인수자금 부족 논란 속에도 하림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한국전력 적자 등 국책은행의 재정불안이 산업구조조정을 재촉했습니다. 한화가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해 한화오션으로 출범시켰고,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작업도 화물사업부 매각이란 고초를 치르며 강행되고 있습니다.
전쟁발로 국제유가 등 원자재값이 출렁이면서 정유업은 연중 적자와 흑자를 오갔습니다. 중국의 저조한 리오프닝효과가 겹쳐 석유화학업은 원가가 오른 경영난을 치렀습니다. 국내 방산업은 전쟁 수요로 인해 해외 수주를 확대했습니다. 방산업이 성장하는 것은 로봇 형태의 새로운 무기 개발도 촉진합니다.
로봇은 챗GPT발 오픈AI가 메가트렌드를 이루며 인공지능(AI) 기술 발달이 빨라진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살상 무기의 AI 채택은 위험하지만 오픈AI는 국내 산업 대들보인 반도체를 구원했습니다. 코로나19 재택 붐으로 AI가 인기를 얻으며 데이터센터 과잉증설이 이뤄진 바 있습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걷히자 센터들의 칩 재고가 늘었고 이는 반도체 시황을 눌렀습니다. 그렇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메모리 적자 늪에 빠졌습니다. 이제 오픈AI의 새로운 비즈니스 가능성이 열리면서 시황도 반등했습니다. 센터들은 신규 수요를 반기고 반도체도 활기를 띱니다.
AI, 로봇과 함께 또다른 메가트렌드였던 전기차는 연초 테슬라가 가격경쟁을 시작했고 수요둔화와 재고 증가의 부침이 두드러졌습니다. 역시 미중갈등에 보조금 차별이 얽혀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이 삭감되자 가격경쟁이 촉발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그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효율이 좋은 국산 배터리를 뒤로 하고 중국산 저가형 배터리가 득세했습니다. 글로벌 완성차들은 가격경쟁 필요 때문에 중국산을 채택했다가 보조금 차별에 막혀 한국 제조사들에게도 LFP 개발을 주문하게 됐습니다.
이처럼 얽히고설킨 공급망 패권 경쟁은 올해 이슈를 점령한 데 이어 내년 미국 대선까지 뜨겁게 이어질 전망입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