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움바강 급류 너머에서 만난 카노제로 암각화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22)

입력 : 2024-04-29 오전 6:00:0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도] 카노제로 암각화가 있는 카멘니섬의 위치 사진=박성현
 
카노제로 암각화로 향하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아침, 칸달락샤를 떠나 드디어 카노제로 암각화를 향해 출발했다. 카노제로 암각화가 있는 곳은 보호구역으로 통제되고 있고 그 주변 일대도 카노제르스키 국립자연보호구역이어서 외국인이 방문하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나는 출국 전 연락을 주고받던 ‘카노제로 암각화 보호구역 박물관’ 측의 안내에 따라 제한구역 방문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면 박물관이 러시아 외무부에 요청서를 보내 통보하고 내무부로부터 체류허가 답변을 받는 방식이었다. 체류기간은 이때 지정한 날짜를 엄격히 지켜야 해서 떠날 때 아쉬움이 남았다. 현지 사정상 계획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해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전화도 안 되는 지역이라 미리 약속된 일정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칸달락샤 시내에 있는 관광지도 안내판. 카노제로 암각화의 위치가 돔 모양의 그림으로 표시돼 있다. 사진=박성현
 
카노제로 암각화는 무르만스크주에 해당하는 콜라반도에 위치한다. 콜라반도는 북극해의 일부인 바렌츠 해와 백해 사이에 있는데, 이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 내 세 섬인 고렐리, 옐로비, 카멘니섬과 해안바위 아지노까야에 새겨진 그림들이 카노제로 암각화를 구성한다. 육지의 해안에 있는 스칼라 아지노까야(표기법상 오디노카야지만 실제 발음과 많이 다르다)는 ‘외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카멘니섬 건너편에 있다. 칸달락샤에서 카노제로 암각화의 핵심인 카멘니섬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길고 험했다. 먼저 아침 9시쯤 박물관 측에서 불러준 택시가 테르스키군의 움바마을로부터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움바마을의 주민이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온 것으로, 카노제로 암각화를 관리하는 박물관이 움바마을에 있고 직원들도 거의 다 마을사람들이라 알음알음 가능한 시스템인 듯했다. 이처럼 이동의 전 과정은 박물관 측에서 조직해 준 덕분에 원활하게 진행됐다.
 
첫 번째 환승장소에서 만난 '카노제로 암각화 보호구역 박물관'의 전지형차(오른쪽, ATV)와 박물관장 스베르치코프 씨(중앙) 사진=박성현
 
약 한 시간 후 움바마을에 채 못 미친 어떤 지점에 택시가 멈춰 서니 커다란 전(全)지형 차량(ATV) 앞에 박물관장 알렉산드르 스베르치코프 씨와 직원 세르게이 씨가 기다리고 있다. 암각화 보호구역의 박물관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이들의 활동은 야외 현장을 오가는 시간이 많아 보였다. 나는 인사를 나누고 곧장 박물관 차로 옮겨 탔다. 이 차는 눈과 늪지대를 다닐 수 있는 수륙양용으로 6개의 대형 바퀴를 가진 트레콜 전지형차다. 오지로 간다는 실감이 나면서 마음이 설렌다. “박물관에서 작년에 구입했는데 아주 비싼 차지요.” 운전을 맡은 세르게이 씨가 말했다. 그의 어조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흩뿌리는 빗속에 전지형차는 나무가 우거지고 진흙투성이인 좁은 늪길을 울퉁불퉁 헤치면서 지나간다. 나뭇가지들이 달려들어 계속 차창을 때리는 게 신기하다.
 
두 번째 환승장소인 니지마강까지 전지형차(ATV)로 숲과 늪길을 달리게 된다. 사진=박성현
 
늪을 지나, 움바강의 급류를 지나
 
카노제로 암각화와 관련된 영화가 있다. 쿠오스마넨 감독의 영화 ‘6번 칸’(2021)이다. 핀란드-러시아 합작영화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인데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 2023년에 국내 개봉됐다. 영화는 모스크바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가 무르만스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무례한 러시아 광부 료하를 만나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를 다룬다. 그녀가 무르만스크행 기차를 탄 이유는 고대의 암각화를 보기 위해서인데 이 암각화가 바로 무르만스크주의 카노제로 암각화이다. 카노제로 암각화가 발견된 것이 1997년이고 영화의 배경도 1990년대 후반이다. 라우라는 겨울에 암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몰랐기에 좌절하지만 료하의 도움으로 각종 방법을 동원해 폭설을 뚫고 암각화가 있는 지점으로 가게 된다. 물론 영화의 핵심은 암각화 자체가 아니다. 하지만 카노제로 암각화가 스토리 전개에 매개체가 되고 있어 개인적으로 더욱 기억에 남은 영화였다.
 
전지형차를 몰고 온 박물관 직원 세르게이 씨(좌)와 배를 운전할 직원 아나톨리 씨(우)가 니지마강 기슭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박성현
 
거의 50분가량 늪과 숲길을 달린 전지형차는 니지마 강가에 멈춰 섰다. 이제 니지마강을 거쳐 로드빈가강으로, 그리고 로드빈가강에서 카노제로 호수로 나아가야 한다. 로드빈가강과 로드빈가의 지류인 니지마강은 모두 움바강의 일부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움바강은 카노제로 호수를 지나면서 이 두 강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의 움바강이 된다. 두 번째 환승장소에는 보트로 나를 이동시켜 줄 박물관 직원 아나톨리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짐과 박물관 측이 현지 근무자에게 보내는 물품을 배로 옮긴 후 강을 따라 출발했다. 이 강은 오네가호수로 갈 때 만난 작고 잔잔한 초르나야강과는 정반대로 크고 물살이 센 강렬한 강이다. 그런데 배는 그때보다 훨씬 작고 나지막해 물살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으니 더욱 설레게 된다.
 
니지마강 기슭에서 배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배를 운전할 박물관 직원 아나톨리 씨(좌)와 전지형차를 몰고 온 직원 세르게이 씨(우). 사진=박성현
 
“휴대폰을 넣으세요! 물에 빠뜨릴 수 있어요!” 카메라용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나를 보고 아나톨리 씨가 외쳤다. 물살이 워낙 거칠어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군데군데 수위가 낮은 지점들을 지날 땐 물속 곳곳에 산재한 바윗돌들이 보인다. 급류가 회오리치는 곳에서는 바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배를 운전하는 아나톨리 씨의 손길이 매우 노련하다. 오래된 포모르 마을의 주민으로 평생을 움바강과 더불어 살아온 그이니 당연한 것이리라. 그의 모습을 보니 감동이 느껴진다.
 
카멘니섬으로 가는 배 운전을 맡은 박물관 직원 아나톨리 씨는 평생을 움바강과 더불어 살아온 마을주민이다. 사진=박성현
 
카멘니섬으로 가는 방향은 남에서 북으로 강의 흐름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는 것이어서 이동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섬으로 들어갈 때는 배로 약 1시간 40분 정도 걸렸는데 며칠 후 섬에서 돌아올 때는 강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어서 그보다 20분 가까이 빨리 도착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속도는 바람에도 크게 좌우된다고 했다. 움바강을 따라 이동하는 길은 거친 자연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길게 이어지는 움바강은 급류가 많고 호수들이 있어 여러 날에 걸쳐 래프팅을 즐기는 러시아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하지만 흐름이 빠르고 돌이 많은 위험한 지점들이 여기저기 있어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 옆을 지나가는 래프팅 배들을 보니 대부분 쌍동선이다. 두 척의 작은 배를 연결해 나란히 함께 가는 구조로, 4~6명이 나눠 타고 노를 저으며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움바강을 따라 래프팅을 하는 사람들이 휴식 중인 모습. 사진=박성현
 
‘카노제로 암각화’ 박물관-보호구역의 풍경
 
드디어 카노제로 암각화가 있는 섬들이 나타났다. “왼쪽이 고렐리섬, 오른쪽이 옐로비섬이에요.” 아나톨리 씨가 손으로 가리킨다. 그 섬들을 지나 좀 더 가니 가장 중요한 섬인 카멘니섬이 보이기 시작한다. 감개가 무량하다! 그 근처에 해안바위 아지노까야가 있다. ‘카멘니’는 ‘돌의’라는 뜻으로 ‘돌섬’이 되는데, 섬에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스칼리스티’라고도 하는데 역시 ‘바위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배가 섬에 다가가자 소리를 듣고 나와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나는 그가 카노제로 암각화 소개서를 쓴 바짐(바딤) 리하초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책에서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박물관 근무를 병행하는 암각화 연구자로, 2012년 고고학자 콜파코프와 슘킨의 책 ‘카노제로 암각화’가 나오기 전인 2011년에 최초로 소개서인 ‘카노제로의 그림’을 출판했다. 
 
카멘니섬에는 2014년 말에 세워진 투명한 돔이 거대한 암각화 바위를 보호하고 있다. 사진=박성현
 
카멘니섬에는 카노제로 박물관에서 파견하는 두 명의 관리인이 일정 기간씩 교대로 근무하는데 내가 체류하는 기간에는 리하초프 씨가 근무 중이었다. 박물관 근무자는 경비를 서면서 암각화를 지키고 방문객들에게 짧은 견학을 진행한다. 방문객은 투어로 오는 그룹도 있지만 대부분 래프팅을 하는 중간에 암각화를 보기 위해 섬에 들른 사람들이다. 여름철이라 내가 머무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래프팅 복장을 한 사람들이 그룹으로 섬을 찾아 암각화를 보고 가곤 했다. 카멘니섬의 주요 암각화 이미지들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는 2014년 말에 세워진 반구형 지붕의 투명한 돔으로 보호되고 있어 겨울철에도 유일하게 볼 수 있다.
 
카멘니섬에 파견된 박물관 직원 겸 암각화 연구자 바짐 리하초프 씨(맨 앞)가 방문객들에게 카노제로 암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성현
 
이름 그대로 돌이 가득한 카멘니섬은 암각화 보호구역이기 때문에 경비와 안내를 맡은 박물관 담당자 외에 관광객이 섬에서 숙박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하지만 학술 목적의 답사를 위해 미리 허가를 받은 터라 나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옆 한쪽에 텐트를 쳤다. 알고 보니 그 바위도 보호돔 바깥에 위치한 암각화 바위였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짐을 풀고 나와 보니 바짐 씨가 배로 막 도착한 방문객 그룹을 보호돔 안으로 안내하고 있다. 나는 그들 속에 섞여 암각화에 대해 설명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카멘니섬에 있는 카노제로 암각화 보호돔 내부.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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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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