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있는 기관들의 무책임한 '게임 탓'

('게임중독' 프레임)②사건 뒤엔 언제나 '게임'
방송서 살인 동기로 게임 '리셋' 강조
정작 대법원은 주된 동기로 인정 안해
검찰도 살해 원인 '게임 중독' 지목
복지부는 자체 해석 대신 ICD-11 참고

입력 : 2024-08-12 오전 6:00:10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게임 세계에서는 기존의 세계를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바로 '리셋'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사건을 저지른)남편은 이 리셋을 현실 세계에서도 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난 6월6일 KBS가 방영한 '스모킹 건'에서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레지던트 4년차 백모씨의 만삭 아내 살해 원인으로 게임을 지목하자, 여성 출연자 두 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무섭다, 무서워", "와, 너무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카메라는 두 여성의 표정을 차례대로 보여주며 게임의 위험성을 강조했습니다.
 
사건의 범인은 정말 게임 때문에 이 같은 참담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실제 대법원 판결은 해당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패널의 진단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같은 공신력 있는 인물이나 기관의 무책임한 '게임 탓'은 사태 재발 방지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의 진짜 원인을 가리는 효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KBS가 방영한 '스모킹 건' 방송에서 전문의가 아내 살해범의 범행 배경으로 게임을 거론하고 있다. (사진=KBS 스모킹건 방송 화면)
 
대법원 "살인 동기 매우 미약"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은 범인이 만삭 아내를 살해한 동기로 게임을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2012년 6월28일 원심이 판단한 살인 동기가 미약하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에 파기환송했는데요.
 
앞서 서울고법은 피고인이 평소 컴퓨터 게임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아내인 피해자와 다툴 만한 여지가 있었고, 피고인이 그런 다툼 끝에 순간적으로 격분해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할 만한 동기도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은 "부부 사이에 다툼의 동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살인의 동기로서는 매우 미약하다"며 "객관적 증거와 이에 기초한 치밀한 논증의 뒷받침 없이 살인의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후 백씨는 파기환송심을 거쳐 2013년 4월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에서 징역 20년형이 확정됐습니다.
 
게이머들은 법원이 게임을 직접적인 살해 원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KBS가 전문가의 입을 통해 게임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했다며 반발했습니다.
 
당시 한국게임이용자협회는 "파기환송심은 게임이 부부 다툼의 원인일 수는 있지만,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 동기는 학업 스트레스와 가정 내 불화 등의 사정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부부 싸움이 일어나고, 이 싸움 과정에서의 격분이 직접적인 살인의 원인이라 설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KBS 시청자 청원에 재발 방지를 촉구했습니다. 해당 청원은 2만6855명이 공감해 역대 최다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에 KBS는 "게임을 결정적 살해 동기로 묘사하지 않았다"며 "리셋이라는 단어도 게임 외 여러 분야에서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흔한 표현"이라고 청원에 답했습니다. 또 지난해 8월 방송에서도 가족 살해 범인의 범행 의도를 인생 리셋으로 묘사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이광민 선생님 역시 때론 밤을 새우며 게임을 즐기시는 열렬한 게임 애호가"라며 "'자신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게임과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명예를 훼손할 리 있겠습니까?'라고 얘기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협회는 "실제 방송 분량 중 많은 비중이 '남편의 게임 이용'에 할애돼 있었다"며 재청원 했습니다.
 
협회는 "방송 내용에서 '게임처럼 현실을 살 수는 없잖아요', '게임 세계에서는 기존의 세계를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잖아요. 바로 리셋을 할 수 있는겁니다', '남편은 이 리셋을 현실 세계에서도 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라 해 어느 시청자가 보더라도 게임에서의 리셋 개념을 살인의 동기로 추정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발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해당 전문의가 2022년 4월 '정신의학신문' 칼럼에서 "삶은 게임처럼 리셋할 수 없어요"라고 적었듯이 '게임과 현실의 혼동' 관점으로 주장을 펴왔다는 점도 짚었습니다. 청원 마감일은 이달 11일로, KBS 측 답변은 없는 상태입니다.
 
이밖에 수사 기관이 범행 동기로 게임을 지목하는 일도 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8월11일 신림동 흉기 난동 살인 사건 수사 결과를 보도자료로 냈는데요. 당시 검찰은 "피고인은 최근 8개월간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을 하거나, 게임 관련 동영상 채널을 시청하는 등 게임 중독 상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게임 중독'은 소관 부처인 보건복지부도 자체 해석을 내지 못하고,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ICD-11)에 포함된 '게임이용장애'를 참고하는 실정입니다. 게임이용장애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9)에 도입할지를 두고 아직 각계가 논의중입니다.
 
정치권에서 여전히 게임과 K-콘텐츠를 구분지어 차별적인 시선으로 본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엔바토엘리먼트)
 
"업계서 연구 기관 세워야"
 
정치권에서도 게임에 대한 몰이해가 자주 포착됩니다. 지난달 한국마사회는 게임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를 패러디한 영상물을 내놨다가 삭제했는데요. 당시 이병진 민주당 의원은 마사회 관리직 성비 불균형을 지적하며 해당 게임이 말을 미소녀로 의인화한 점, 캐릭터가 교복을 입은 점 등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실제 경마의 전략 요소와 일본 명마 관련 일화를 구현해 일본에서 인기를 얻었고, 한국에선 12세 이용가로 서비스중입니다. 캐릭터를 성적 대상화하는 2차 창작물에 대한 제재도 엄격하다고 알려졌습니다. 일본 농림수산부 대신이 이 게임을 경마 홍보의 예시로 언급할 정도로 일본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이 때문에 공신력 있는 기관과 정치권 등에서 사회 문제의 원인을 게임 탓으로 돌리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철우 변호사는 "사회적으로 복잡한 문제와 개인의 동기를 추정할 때 가장 화살을 돌리기 쉬운 게 '미지의 원인'"이라며 "이병진 의원이 우마무스메를 깎아내리면서 웹툰을 K-콘텐츠 선봉장으로 추앙했는데, 그 웹툰의 수위가 우마무스메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만화와 TV, 힙합 등이 문화의 우리 문화의 주류로 인정받기 시작한 만큼, 게임 역시 게임에 익숙한 세대가 관련 기관에 들어가거나 정치인이 된다면 해결 될 문제"라고 했습니다.
 
게임 관련 연구 확대가 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게임을 악마화하는 논문과 보고서가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며 "게임 업계에서 게임 연구 기관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교수는 "게임진흥원을 부활시켜 기관의 전문성을 높이고, 게임 R&D 센터도 만들어 지속적인 연구 결과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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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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