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아·한동인 기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19일 야당이 단독 처리한 양곡관리법 등 6개 쟁점 법안들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헌법상 자유시장 경제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간 정부가 반대 의견을 표명해온 만큼 일관성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됩니다. 야당은 곧바로 거부권 행사에 강력히 반발했지만, 당초 예고했던 '권한대행 탄핵'은 일단 보류한다는 입장입니다. 대통령에 이어 권한대행마저 탄핵할 경우 자칫 국정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습니다.
결국 내년 1월1일까지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김건희 특검법'(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주가조작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과 '내란 특검법'(윤석열정부의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행위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정국 분수령이 될 전망인데요. 정부 안팎에선 김건희 특검법은 거부권 행사에, 내란 특검법은 수용 가능성에 각각 무게를 두고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이에 따라 향후 정국 급랭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20년 만에 '권한대행 거부권'…야 "일단 지켜보자"
한 권한대행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6개 쟁점 법안(국회법·국회증언감정법·양곡관리법·농수산물유통및가격안정법·농어업재해대책법·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2004년 고건 전 총리 이후 두 번째입니다. 그는 "어떠한 선택이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인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고민과 숙고를 거듭했다"며 각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우선 양곡 4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법들이 시행되면 시장기능을 왜곡해 쌀 등 특정 품목의 공급과잉이 우려되고 막대한 재정부담을 초래할 것"이라며 "재난피해 지원 및 보험의 기본 원칙과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농수산물유통및가격안정법 개정안과 관련해서는 "농산물 생산이 가격안정제 대상 품목으로 집중돼 농산물 수급 및 가격이 매우 불안정해지며 과도한 재정부담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원활한 예산집행을 위해 국회가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정한 헌법의 취지에 반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민주당은 거부권 행사에 "윤석열 시즌 2인가"라며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당장 탄핵 실행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 이은 탄핵 국면에서 국정 혼란 수습이 중요 화두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통령이 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야당의 반복적인 탄핵 선동 등을 내세운 상황에서 굳이 명분을 더해주는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민주당이 거부권 행사에 한발 물러선 것은 '윤석열 탄핵소추안' 심리를 벌이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9인 체제 운영에 미칠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합니다. 현재 민주당은 국회 추천 헌법재판관 3인에 대한 추천 절차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요. 이들에 대한 임명 절차의 마지막은 한 권한대행이 갖고 있습니다. 6인 체제에선 헌법재판관 가운데 1명만 반대해도 탄핵 인용 정족수인 6명에 못 미쳐 탄핵이 기각될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한 대행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자칫 헌법재판관 임명 시기만 늦춰 탄핵 완결이 지연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을 통해 "지금 당내에서 거부권 행사 관련해 즉각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관련 논의는 현재 진행하고 있지만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건희 특검 거부권 '기류'…야, '탄핵' 으름장
6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 결정을 내린 한 권한대행은 다음 수순으로 김건희 특검법과 내란 특검법에 대한 판단을 앞두게 됐습니다. 이 두 법안은 지난 17일 국회에서 정부로 이송되면서 접수 15일 이내인 내년 1월1일까지 거부권 행사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앞서 6개 법안과 달리 이 두 법안은 정치적 성격이 강한 만큼 한 권한대행의 고심이 더 깊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정부와 정치권 안팎에선 김건희 특검법과 관련해서는 기존 입장대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반헌법적 요소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가 큽니다. 반면 내란 특검법은 수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합니다. 내란 특검법의 경우 한 권한대행이 수사 대상으로 올라 있는데다, 이미 내란죄 피의자로 입건된 상황인 만큼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총리실 관계자는 "연말까지 여론 추이를 지켜보면서 거부권 행사 여부를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을 아꼈습니다.
민주당은 이날 거부권 행사에는 한발 물러서되, 김건희·내란 특검법에 관해서는 압박 수위를 더 높일 전망입니다. 특히 한 권한대행이 김건희 특검법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야당에선 탄핵 카드를 꺼내들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경우 국정공백은 물론, 국민의힘의 탄핵 지연 작전이 성공하는 만큼 야권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한 권한대행 입장에서는 힘이 들더라도 윤석열정부 기조를 계속 유지해 가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서도 "김건희·내란 특검법을 거부할 경우에는 탄핵이 들어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12월31일까지 계속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대신 그 사이에 여야가 특검법에 대해 합의점을 찾는 것에 대해 기다려볼 수도 있다"며 "두 특검법안 모두 정치적 파장이 커 한 권한대행도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고민을 거듭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진아·한동인 기자 toyouja@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