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훈 산업1부장] 그는 내 우상이었다. 대학 시절, 그가 쓴 화사한 문장들을 끼고 살았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치기 어린 감수성에 불을 질렀고, 소설 『기자들』을 읽고 기자라는 직업에 매료당했다. 『고종석의 유럽통신』과 『코드 훔치기』는, 글이라는 집의 두 기둥인 논리와 수사가 행복하게 만나는 전당이었다. 난 ‘고종석빠’였고 그것은 내 기꺼운 자랑이었다.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는 취지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화면 갈무리)
그가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엔 애증으로 남았)던 한 신문사에 내가 기어코 들어갔던 것은 중2 때 우연히 읽고 그 신문에 환장을 해버린 탓이었지만, 그곳에 그가 다니지 않았더라면 결정을 그리도 쉽사리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80~90년대 수많은 운동권 대학생들이 그렇게 선망하고도 끝내 들어가지 못한 그 신문사는 내게, 정운영과 송건호와 리영희의 신문사라기보다 고종석의 신문사였다.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장들에서 어른거리는 그의 그림자를 느낄 것이다.
그의 글을 탐독하던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월드컵 열기로 들끓었던 2002년 초여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홍세화 선생이 마련해준 자리였다. 나처럼 ‘홍세화빠’이기도 했던 그는, 그날 만취해 크고 작은 실수들을 했다. 글과 사람은 다르다며 미학적 분리주의를 얘기하던 그의 말이 결국 그에게 되돌아가는 것을 보는 일은 씁쓸했다. 정말 좋아하는 대상은 만나지 말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사랑은 어리석도록 질긴 것이어서, 그 이후에도 이곳저곳에 실린 그의 글들을 찾아 읽었다. 그 글들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물론 그의 문장은 여전히 우아하고, 논리는 정연했으며, 논조는 조심스러웠다. 도리 없이 밑줄을 긋고, 대책 없이 무릎을 쳤다. 하지만 그의 어떤 글들이 내게 께름칙했던 것은, 더러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밑에 조회해보고 살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말로부터 그의 글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면에서 그의 글을 찾을 수 없게 된 수년 전부터는 가끔 그의 페북을 드나들며 훔쳐보기를 해왔다. 그러던 세월의 어느 아침에 그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것을, 그 지지의 강도 만큼이나 이재명(과 나아가 문재인)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일로 자신이 친정으로 여겼던 신문사 출신 지인들과 절연을 했다는 것도.
멀게는 노무현이 지역주의를 해소한다며 민주당이 아닌 '전국정당화'를 꾀할 때부터 시작된 그의 반노의식은, 조국 사태를 맞으며 386 일반에 대한 비난(때론 혐오)과 함께 반문 정서로 치달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극우적 발언을 일삼은 검찰주의자를 옹호하는 그가 좌파적 자유주의자로 평생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해온 바로 그 사람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뒤숭숭한 일이었다. 학살자인 전두환 아들이 운영하는 출판사 책은 읽지도 않는다는 그가,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한 윤석열을 지지한다는 것 또한 참 얄궂은 일이었다. 그가 프랑스 사상가 자크 라캉을 빗대, 한 번도 마르크시스트였던 적이 없지만 반동적 시류에 몸을 담은 적도 없다고 했던 말과 달리, 한 번도 마르크시스트였던 적이 없던 그는 어느새 반동적 시류에 몸을 담고 말았다.
친구 사이가 아닌 내게 그의 페북은 2022년 8월로 멈춰 있지만, 자신이 그토록 지지한 윤석열이 파면된 오늘, 그가 자신의 오류를 되돌아볼지 궁금하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라고 썼다. 그의 말에 나를 비춰본다.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