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5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공사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6차 방송토론회에 참석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의 왼쪽 손바닥에 논란이 됐던 '왕(王)' 자가 지워져 있다. (사진=뉴시스)
긴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종종 목격한다. 가끔은 우리가 아는 과학 너머에 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초자연적 사안을 보도할 때는 일정한 기준점을 잡아야 한다. 비슷한 사안이라도 기이한 천문 현상이나 UFO 같은 사건을 보도할 때는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병을 낫게 하거나 국가 미래를 내다본다는 초능력 영역을 보도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이를 악용해 돈과 권력을 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능력 영역인 점술과 정치인, 언론은 어떤 관계일까. 선거 때가 되면 용하다는 점집이나 철학관은 정치인으로 넘쳐난다. 이런 정치 행태에 대해, 대개 언론은 알아도 눈을 감는다. 언론인 스스로가 중차대한 선거를 앞두고도 점술가의 예언을 기사나 칼럼에 인용하기까지 한다. 윤석열정부 시절에 점술 정치와 언론의 폐해가 가장 진하게 드러났다.
고백할 얘기가 있다. 2022년 초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벌어질 무렵이었다. 필자는 방송사 보도 책임자였다. 어느 날, 보도국 간부가 이런 보고를 해 왔다. 한 기자(현 봉지욱 뉴스타파 기자)가 윤석열 후보 부부의 점술 관련 내용을 취재해왔는데, 보도 요건에 맞지 않아 '킬'(kill) 했다는 내용이었다. 거명된 점술인은 건진법사였다. 간부가 '킬' 한 근거는 이랬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점술을 믿는 개인의 자유도 있는데, 당사자도 아닌 지인의 전언을 근거로 하는 보도는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설명을 듣고 그 간부의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편집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후속 보강 취재를 주문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선을 앞두고 골치 아픈 점술 문제를 가져왔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취재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건진 지인의 녹취 내용은 이후 <세계일보> 등의 추적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2024년 가을이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사업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 정치에 밝은 지인을 통해 정권의 숨은 실력자라는 분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무속인이었다. 무속인은 말쑥한 양복 차림이어서 주술 느낌은 주지 않았다. 권력과의 친분을 보여주는 물증을 보여주고 친분을 과시하던 무속인은 수고비로 몇억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업가는 무속인과 얽히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권력과 점술이 잘못 손을 잡을 때 어떤 혼탁한 토네이도가 생겨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종의 신비학에 가치 함몰될 수 있다는 징조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수차례 반복해 드러났다. 아쉽게도 이에 대한 언론의 검증은 매섭지 않았다. 전통 신앙인데, 문화 관행인데, 자유 기본권인데 하며 치열한 의제의 도마 위에 올리지 않았다.
2018년 전국 동시 지방선거 당시 공천을 대가로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와 함께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씨가 12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두번째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2021년 가을,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회 때 '손바닥 왕(王) 자 논란'이 벌어졌다. 윤석열 후보의 손가락에 그려진 왕(王) 자가 한 번도 아니고 적어도 세 차례 이상 TV 화면에 잡힌 것이다. 논란이 일자, 윤 후보 측 인사들은 재빠르게 레거시 언론과 해명 인터뷰를 했다.
"후보가 집에서 나오는데 동네에 연세 좀 있으신 여성 주민 몇 분이 후보를 붙들고 격려차 적어줬다. 세정제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서, 결국 지우지 못한 채 그대로 방송에 나가게 된 것"(<경향신문>과의 인터뷰), "동네 할머니들이 몇 차례 힘 받으라고 손바닥에 적어준 것에 불과하다. 성원의 메시지가 뭐가 문제가 되나"(<중앙일보>와의 인터뷰) 등이다. 다만 수성펜이든, 유성펜이든 알코올이든 소독제로 지우면 다 잘 지워진다는 <한국일보>의 짤막한 검증보도가 화제가 됐다.
언론은 무속, 역술 행위의 배후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하지만 이 포인트를 잡은 쪽은 언론보다는 '국민의힘' 내부였다. 2021년 10월이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TV토론회에서 유승민 후보는 천공 문제로 윤석열 후보를 코너에 몰아넣는다. 유 후보의 공격은 그야말로 집요했고 윤 후보의 방어는 힘겨웠다. 윤 후보의 얼굴에 흐르던 당혹스러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 후보가 "천공 스승님 아십니까?"라고 묻자, 윤 후보는 처음엔 들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유 후보가 "천공은 본인이 스스로 윤석열 후보의 멘토, 지도자 수업을 시키고 있다 자칭하는 분인데 모르시는가 보다"고 재차 공격하자, 윤 후보는 "제가 알긴 하는데 멘토니 하는 얘기는 과장된 이야기"라고 말을 살짝 바꿨다. 이후 또 다른 경선 토론에서 유 후보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윤 후보님, 제가 지난 토론 때 '천공을 아느냐' 질문드렸더니 후보님의 지지자들이 저에게 굉장히 거칠게 항의하고 욕했어요. 그런데 이 문제는 대통령이 의사결정을 할 때 누구 이야기를 듣느냐는 중대한 문제이다. (중략) 제가 정법(천공) 유튜브 영상을 몇 개 봤는데, 매우 황당했어요. '내 손바닥이 빨간 이유가 손바닥에서 에너지가 나가기 때문이고, 이걸로 암 걸린 환자가 피를 토하고 암이 나았다', '기독교에서 성령을 받들거나 무당한테 성령을 받들거나 똑같다', '백두산이 정월 초하루에 영하 수십 도가 돼도 정법이 가면 칼바람이 멈추고 봄날씨가 된다' 등 이 사람하고 윤 후보님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누가 소개해줬습니까?"
거듭된 공세에 윤 후보는 부인 김건희 여사와 함께 몇 차례 천공을 만났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유 후보가 "정법(천공) 같은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왜 만나느냐"고 묻자 윤 후보는 "아니, 만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답한다. 이후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천공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 윤 후보 측의 공식 입장이었다.
역술인 천공이 지난 4월19일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이건희 기증관 건립 장소)를 돌아보고 인사동으로 이동하고 있다. 수행원에 따르면 "이날 천공은 경복궁과 이건희 기증관 송현동 부지를 돌아보고 인사동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사진=뉴시스)
유승민 후보가 제기한 '점술에 휘둘리는 대통령 후보' 프레임은, 이후 대선 본선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윤석열정부가 등장한 이후에도 한동안 다수의 언론은 점술 정치의 폐해를 외면했다. 윤석열정권이 1년이 지난 뒤부터 <뉴스토마토>가 천공의 대통령 관저 개입 의혹을, <뉴스타파>가 건진의 정치 개입 의혹 등을 연이어 보도한다. 뒤늦게 나마 정권과 점술의 관계가 아주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한 사람은 깨울 수 없다."
한 고승의 명언이다. 윤석열 정권이 형성될 때 상당수 언론은 ‘잠든 척한 사람’이었다. 점술과 정치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랬다. 하지만 소수의 탐사저널리스트는 잠들지 않았다. 결국 잠든 사람은 물론, 잠든 척한 사람까지 깨워냈다.
이규연 탐사저널리스트(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