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외교부 북미국 서기관이 청와대에 실명으로 투서를 했다. 내용은 두 가지였다. 북미국 외교부 인사 회식 자리에서 조현동 북미3과장 등이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종석 사무차장, 청와대 386(3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인사들을 원색적으로 폄하하고 비난했다는 것과 NSC가 용산미군기지 이전 협상에서 기지 이전 비용을 모두 한국이 지불하는 등 대미 관계에서 자주적이지 못하며 대통령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투서의 제1공격 대상은 외교부 북미국이었고, 제2 대상은 NSC였던 것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열린 통일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외교관의 투서 한 통으로 '자주파-동맹파' 논쟁 수면 위로 등장
이 투서가 당시 '자주파-동맹파' 논쟁을 수면 위로 떠올려 '공인'받게 만들었고, 2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투서를 접수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조사에 나섰고, 다음 해 1월 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북미3과 회식 자리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발언들이 오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 여파로 윤영관 외교부 장관이 사임했고, 위성락 북미국장은 노 대통령이 "능력 있는 사람은 과오가 있더라도 다듬어 쓴다"고 배려하면서 이종석 차장 휘하의 NSC 정책조정실 정책조정관(실장급)으로 전보됐다.
사건의 장본인인 조현동 과장은 보직해임 뒤 국방대 파견으로 좌천됐다. (투서 내용 중 NSC를 겨냥한 대목에 대해서도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직무감찰을 벌이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큰 파장을 낳게 되지만 일종의 '자주파 내부' 논쟁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은 '북미 3과 회식' 사건보다는 약했다.)
"외교부 일부 직원들은 과거의 의존적인 대외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참여정부가 제시한 새로운 자주적 외교정책의 기본 정신과 방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공·사석에서 국익에 반하는 부적절한 언행을 수차례 반복했다."
당시 청와대 인사수석은 윤 장관 경질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는데, 이 발언은 뜻밖의 중대한 부작용을 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교장관 경질 배경을 청와대 고위 인사가 '자주적 외교'와 연결해 설명하면서 '자주파 대 동맹파 갈등설'은 '설'이 아닌 기정사실이 됐고, 결국 그 파워게임에서 자주파가 승리했다고 공인됐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05년 초 노 대통령과 NSC상임위원장으로 외교안보 분야 전체를 관장하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평화협정을 적극 추진했다. 반기문 장관 등 외교부는 그렇게 되면 유엔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지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이를 반대했고, 정 장관은 반 장관을 질책하는 등 마찰을 빚었다. 역시 등장인물이 조금 달라진 '자주파-동맹파' 갈등이었다.
당시의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이런저런 부침 속에서도 이후 중책을 맡게 된다. 조현동 과장은 이명박정부에서 6자회담 차석대표인 북핵외교기획단장을 맡아 회생한 뒤 윤석열정부에서 외교부 1차관과 주미대사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위성락 국장은 NSC 근무 반년 만에 주미 공사로 나갔다.
그 뒤 이명박 정부에서 6자 회담 수석대표인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주러 대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이재명정부의 첫 국가안보실장으로 외교·안보를 지휘하고 있다. 이종석 차장은 노무현정부 통일부 장관을 맡은 뒤 이재명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맡았고, 정동영 장관도 현 정부에서 20년 만에 통일부 장관으로 컴백했다. 공교롭게도 위성락, 이종석, 정동영 3인이 동시에 이재명정부에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언론은 당연하게도 '자주파-동맹파 재등장'이라고 접근했고, 이런저런 이견이 노출되면 어김없이 갈등 프레임을 들이댄다.
하지만 이런 프레임은 낡아도 너무 낡았다. 2000년대 초반 주한미군 감축과 이라크 파병 문제 등을 둘러싸고 NSC 사무처와 외교부·국방부가 노선 갈등을 빚은 것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인식과 태도 차이가 그 원인이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그 미국과 북한이 달라졌다. 특히 트럼프 미 행정부가 관세 협상에서 보이고 있는 행태에 대해서는 보수 세력도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는다. 외교·안보 분야 대표 보수 논객인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한·미 관세·투자 합의에 매달릴 필요 없다"며 "우리에게 카드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협상이 결렬되면 미국도 조선산업 재건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상교섭본부장 출신인 김종훈 전 새누리당 의원도 "한국 정부가 협상의 판을 깨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이대로면 판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평가한다. 3500억달러 선불 투자 요구는 불가능한 것이니 판을 깰 각오로 임하라는 주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국론이 통일된 것인데, 이는 '트럼프 미국'에 대한 인식에 컨센서스(합의)가 만들어져 있다는 얘기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캄보디아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 현황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왜 '동맹적 자주파'가 아니라 '자주적 동맹파'라고 했을까
북한은 어떤가. '통일'을 국가 정체성처럼 내세우더니 이제는 통일 폐기는 물론이고 같은 민족도 아니라고 한다.
이재명정부에서 정동영 장관의 '평화적 두 국가론'이 '자주파-동맹파 갈등론'을 점화한 불씨라고들 한다. 하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위성락 실장과 결정적 차이가 없다. 남북 관계는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이며, 헌법 영토 조항은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정 장관이 "북한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3대 국가의 하나가 돼 버렸다"고 말한 것이,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는 비핵화 과제는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든 남북 접촉을 끌어내야 하는 통일부 장관과 외교·안보 분야 전체를 봐야 하는 안보실장의 시각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자 출신에 집권당 대선 후보를 지낸 현역 정치인과 평생 외교관이 미국과 북한에 대한 감수성이 다른 것도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긍정적 효과가 훨씬 클 수 있다.
정동영 장관은 이재명정부 내 외교안보 인사들이 '자주파'와 '동맹파'로 갈리고 있다는 비판을 "현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모두가 '자주적 동맹파'"라고 반박했다. 왜 '동맹적 자주파'가 아니라 '자주적 동맹파'라고 했을까. 기실 우리 제도 정치권 인사 중에 동맹파가 아닌 이가 몇이나 될까. 기실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한·미 동맹이 한국 외교의 기본 축이라는 걸 부정하는 이가 있을까.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