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일반적으로 태국과 베트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전 세계 최고의 휴양 국가이자 관광 국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과 맞닿아 있는 인도차이나반도 유일의 내륙 국가 '라오스'. 낯선 만큼 모든 것이 어색하지만 그 속살을 살펴보면 의외로 우리와 많은 부분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한 곳이기도 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글로벌 프로젝트 '은사마'가 주목하는 해외 거점 국가 라오스의 모든 것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놀이하는 인간, 라오인
라오인은 조용하다. '안녕하세요'라는 뜻인 '싸바이 디' 하고 인사하기보다 미소나 눈짓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베트남 거리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모터바이크 행렬과 차량 경적에 시달리다 온 여행자라면 바로 이웃인 라오스 거리의 극적인 대비에 오히려 놀랄 수 있다. 동틀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이뤄지는 탁발과 공양 의식은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미덕과 인상 때문에 단기 방문자들은 라오인의 진면목을 놓칠 수 있다. 라오인은 친구나 이웃끼리 가벼운 술자리만 있어도 앰프 출력을 최대로 올린다. 나는 자정을 넘어까지 앰프를 동원해 생일 파티를 하던 이웃집에, 새벽 일찍 일을 나가야 하니 자야 한다고 하소연하러 간 적이 있다. 이웃집 남자는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큰 양보라도 하듯 새벽 1시까지만 앰프를 켜겠다고 했다. 라오인은 내남없이 같은 입장이라 불평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나라'라 불리듯 라오스는 근대라는 시대에 늦게 진입했다. 라오인은 전반적으로 노동 중심 가치관을 내면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 바로 놀이다. 놀이하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한다면, 그 표본은 라오인일 것이다. 노는 데 진심이다. 축제에 살고 축제에 죽는다.
죽기 살기로 노는 라오인
탓루왕 축제에서 탑돌이를 하는 라오인. (사진=우희철)
2023년 유네스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태국 물축제 '쏭끄란'을 라오스에서는 '쏭깐'이라고 한다. 쏭깐과 쏭끄란은 산스크리트어 '움직이다'에서 온 것으로 같은 단어의 다른 발음이다. 우리의 설날과 비슷하지만 라오스·태국의 설은 사흘이 한 묶음이다. 과년의 마지막 날, 과년도 아니고 신년도 아닌 중간 날, 새해 첫날이 태국은 4월13~15일, 라오스는 4월14~16일이다.
새해맞이 주요 의식은 붓다를 씻기고 정화를 위해 집안 어른이 가족에게 물을 부어주는 일종의 세례 의식이다. 보통 그믐날에 집을 청소하고, 중간 날에는 절에 가서 모래로 수미산을 상징하는 탑을 쌓고, 새해 첫날 이웃에게 물을 뿌려준다. 요즘 모래탑 쌓기는 루앙프라방 강변이나 시골에서만 볼 수 있다. 사람마다 말이 다르지만 보통 절 일곱 곳 또는 아홉 곳을 돌며 불상을 꽃물로 씻긴다. 과거에는 화장 장례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절에 모래가 있었다. 지금은 일부 절을 제외하고는 화장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모래탑을 쌓는 관습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다.
놀이를 좋아하는 라오인과 따이인은 신년 의식을 물싸움 축제로 변모시켰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닿으면 꼭 한번 참여하라고 권하고 싶은 축제다. 라오스에서라면 루앙프라방이 전통 문화를 경험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이 축제는 무엇보다 재미있다. 거족적으로 물싸움을 한다. 서로 물세례를 퍼붓고 맞으며 즐거워한다. 최고 더운 건기 말이라 절기에 딱 들어맞는 축제다.
3월 중순이 되면 벌써 분위기가 들떠 직장에서 일손을 놓고 업무를 신년으로 이월하기 일쑤다. 신년 축제가 끝나도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야 사회가 정상화된다. 사실상 신년 축제 기간을 달포 정도로 보는 것이 현명하다.
내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할 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행객이 숙소를 찾는 주된 이유는 왕위양(Vang Vieng)으로 편하게 떠날 수 있는 차편을 마련해주기 때문이었는데, 15인승 미니밴 차주나 기사들이 신년 축제 기간에 차량 운행을 중단해버려 숙박객을 다음 행선지로 보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식당도 문을 닫았다. 여행자 처지에서는 먹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신년 축제가 가까워지면 라오스에 관심이 있는 지인들을 초대해 우리가 잃어버린 잔치를 경험하게 했다. 트럭도 한 대 빌려 짐칸에 큰 양동이를 실고 물을 채워 참가했다. 정월대보름날 달집을 태워본 사람에게는 그 기억을 되살려주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이 진풍경을 이미지로 남기게 하고 싶었다. 라오인은 원래도 밥 인심, 술 인심이 좋은데 축제 중이라면 먹을거리도 문제 없다. 공짜가 민망하다면 적당한 사례만 잊지 않으면 된다.
순해 보이기만 했던 라오인은 이 기간에 정말 죽기 살기로 논다. 태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물축제 기간에 252명, 2024년에 200명 이상, 2025년에는 138명이 숨졌다. 부상자는 그 몇 배다. 라오스라고 다를 리 없다. 문화는 주변이 원형을 더 잘 보존한다.
문자 그대로 불면불휴로 논다. 쏭깐이 시작되는 날부터 액운이 떠나지 않은 중간 날까지 잠을 자서는 안 된다. 그믐날 밤부터 새해까지 눈을 뜨고 있어야 눈썹이 세지 않는다고 믿었던 우리네 풍속과 닮아 있다.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로켓을 만들어 가장행렬 중인 라오인. (사진=우희철)
"즐기셨나요?"
라오인은 즐긴다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산다.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잘 즐기셨냐'고 줄곧 묻는다. 한국인을 포함한 근대인에게 노동은 가치의 중심이다. 라오인은 즐기는 것이 우선이다. 이런 즐거움을 좀처럼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라오인들이 결근 사유를 '집안일'이라고 했을 때 가장 황당하다. 상을 당했다거나 누가 아프거나 사고가 났다고 하지 집안일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경우 대부분 잔치 때문이다. 잔치라면 술과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라오스에서 매출 1위 기업이 독특한 맛으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비어라오(Beerlao)를 생산하는 회사일 정도다. 잔칫집을 가보면 모계사회답게 여성들이 주역이다. 숫기 없는 라오 남성은 주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거나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여성들은 술기운에 흥이 나 춤을 추는 경우가 많다.
라오인은 노동을 싫어한다. 이들은 최소한의 노동으로도 지독한 결핍이나 생존 위협을 견딜 수 있었던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따이인이 중국에서 디엔비엔으로 내려왔을 무렵 만들어진 후기 창조설화에서 창조주의 실수로 만들어진 어두운 피부의 노예가 하는 역할이 육체노동이라는 이야기 구조가 이를 반영한다.
프랑스 식민 당국이 가장 어려워했던 일도 라오인을 길 닦기 같은 노역에 동원하는 일이었다. 결국 프랑스인들은 라오인을 포기하고 비엣인들을 들여와 일을 시켰고, 이에 마지막 왕궁이 있던 루앙프라방을 제외한 도시에는 라오인보다 비엣인 인구가 많았다.
저개발 또는 발전 도상에 있는 국가에 정착한 한인들이 하는 현지 주민에 대한 불평이나 '국민성'에 대한 평가는 노동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근대문명의 정신적 바탕은 무엇보다 노동에 대한 사상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돌아오는 수요일 5일이 탑돌이 행사인 탓루앙 축제다. 이 축제는 불교가 지배했던 고려가 어떠했을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수도는 인파로 미어질 것이고 라오인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다시 보여줄 것이다. 축제 속의 종교, 종교 속의 축제! 종교 속에 사는 라오인에게 불참은 파계에 가까운 감정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하안거를 끝내는 날 왓옹뜨 사원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사미승. (사진=김진석)
라오스=프리랜서 작가 '제국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