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훈 산업1부장] 선생을 처음 본 것은 1999년 6월께였다. 서울대에서 열린 강연회 자리였다. 친구와 강연회 가는 길에 ‘긴 프랑스 망명 생활 뒤 모교 후배들을 만나는 선생의 감정이 남다르지 않겠냐’고 얘길 나눴다. 순진했다. 선생은 서울대 후배들에게 ‘여러분들이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개혁 대상인 한국 사회 기득권층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덕담을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대학시절 기획했던 홍세화 강연회 포스터. 선생은 동아리 선배가 찍은 이 포스터 속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때 선생의 나이는 지금 나보다 겨우 다섯 살이 많았다. (사진=우종국)
선생은 그 뒤로도 여러 자리와 지면을 빌어 자기 성찰을 이야기했다. 강연이 끝나고 선생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앞 표지에 저자 사인을 받았다. 선생은 ‘반갑습니다 홍세화’라고 썼다. 유신 말기 남민전 사건으로 망명길에 오른 그는, 그 20여년의 세월 동안 날이 서 있었다. 다만 그날은 타인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벼려 있었다. 자기성찰이라는 해묵은 단어는 그 방증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한답시고 학교에서 신문 비슷한 지라시를 만들어 뿌렸다. 인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선생을 연사로 강연회를 기획했다. 당시 한겨레신문사 기획위원으로 일하던 선생은 흔쾌히 수락했다. 강연은 성황을 이뤘고, 신촌역에서 이뤄진 뒤풀이에 선생은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실연의 상처를 심하게 앓던 이듬해 가을, 난 느닷없이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1 때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였을까. 지금 찾아뵙고 싶다는 맥락 없는 말에 선생은 역시나 흔쾌히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현관문을 열어주며 예의 밝게 웃던 선생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가족을 파리에 두고 선생은 합정동 빌라에 살았다.
선생은 언제든 놀러오라고 했고 철없던 나는 동아리 친구나 후배들과 무리 지어 찾아뵙곤 했다. 그때마다 선생은 싫은 내색 하나도 없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선생의 합정동 빌라는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그렇게 선생의 집을 드나드는 행운을 누렸다. 한 작가의 표현을 훔치자면, 지하철에서 선생께 전화를 건, 그해 9월 어느 날은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길일이었다.
선생은 일상에서조차 민주적이었다. 식탁에 앉아서 같이 차를 마실 때나 밥을 먹을 때, 내 쪽에 냅킨이나 물통이 있어도 그것 하나 달라고 하지 않았다. 본인이 몸을 움직였다. 당신 아들과 나이가 엇비슷했는데도 그는 무엇하나 시킨 적이 없었다. 그건 선생이 가진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선생의 댁에서 기식하는 것이 죄송스러워 화장실 청소 같은 것을 해놓으면 선생은 되레 미안해하셨다.
광어회를 사 와서 김과 같이 밥에 싸 먹는 걸 선생은 좋아하셨다. 금요일에는 여럿이서 외식도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옷을 잘 차려입고 신촌 클래식 카페에서 담배를 태우며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저녁은 순두부백반을 먹었다. 노래방에 가면 선생은 이브 몽땅의 <고엽>을 불어로 불렀다. 선생은 멋있었지만 쓸쓸해 보였다. 그런 선생과 멀어지게 된 것은 뜻밖이었다. (to be continued…)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