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범용제품 과잉으로 감산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2018년 대비 53~60%로 확정하자, 석유화학업계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감산 협의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온실가스 감축 의무화까지 떠안게 되자, 업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구조조정을 추진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공장 문을 닫게 됐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옵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여수산단은 LG화학과 GS칼텍스 간 합작 협의가 이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합의안이 도출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애초 LG화학이 여수 NCC 2공장을 GS칼텍스에 매각하고 이후 합작사(JV)를 설립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세부 조건과 수익성 평가를 놓고 조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울산산단 역시 실질적 진전은 없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SK지오센트릭, 에쓰오일, 대한유화 등 3개사가 감산 범위와 통합 구조를 논의 중이지만, 컨설팅 용역만 잇따르고 있습니다. 에쓰오일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대한유화는 맥킨지와 베인앤드컴퍼니를 포함한 후보군을 검토 중이고, SK지오센트릭은 여전히 외부 자문사 선정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대한유화와 에쓰오일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SK지오센트릭의 NCC 인수를 타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매각가(약 1조원대)와 지분 참여 비율을 놓고 입장 차가 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산산단이 그나마 진척을 보이며 흐름을 이끌고 있습니다.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은 합작사 HD현대케미칼의 지분을 기존 6:4에서 5:5 수준으로 재조정하는 방안을 사실상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롯데케미칼이 보유한 일부 범용 설비를 현물 출자해 합작사 자산으로 편입시켜 설비를 통합하는 방식입니다.
석화업계 관계자는 “대산 쪽은 정부 발표 이전부터 논의를 진행해 빠를 수 있지만 다른 곳은 이제 시작했는데 결과가 바로 나오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산업 재편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강화된 감축 목표가 제시되면서 업계의 부담이 한층 가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2035년까지 2018년 대비 53~60% 감축 목표를 달성할 경우 철강·정유·시멘트·석유화학 4개 업종에서만 약 5조원의 추가 배출권 구매비용이 발생합니다. 이들 업종이 국가 온실가스 배출의 약 30~40%를 차지하며, 석유화학 비중이 전체의 11%인 점을 감안하면, 석화업계 부담만 약 1조6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계산됩니다.
이마저도 단순한 배출권 비용만을 반영한 수치입니다. 기존 설비로는 탄소 감축에 한계가 있을 경우 연료를 전환하거나 개보수형 투자가 필요합니다. 노후 보일러나 압축기를 고효율 장비로 교체하고, 석탄·중유 대신 LNG·수소·전기 등 탄소 배출이 적은 연료를 사용하는 식입니다. CCUS(탄소포집·활용·저장) 설비, 폐가스 재활용 등 감축 설비 투자까지 포함할 경우 부담은 훨씬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신규 투자 여력은 사실상 없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하소연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기업들이 원자재를 수입해 극한의 효율로 부가가치를 창출해온 만큼 에너지 사용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감축만 요구하는 것은 결국 공장 문을 닫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