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서학개미' 아닌 '화폐 주권' 논하라

입력 : 2025-12-02 오전 6:00:00
'고환율'은 무거운 난제다. 과거 안정권으로 여긴 원화 환율이 1100~1200원대를 넘어 1400원대, 1500원 선까지 위협하고 있다. 위기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겠지만 국민의 실생활, 산업 전반의 비용 구조, 한국 경제의 체질까지 흔들 수 있는 중대 위협이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달러화 기준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2024년 2557조원에서 2025년 2611조원으로 2.1% 상향을 전망한 바 있다. 하지만 원화 기준 GDP 증가는 환율 상승폭의 압도로 쪼그라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환율을 일시적 현상이 아닌 '고환율 뉴노멀'에 진입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고금리 정책 유지, 글로벌 불확실성 확대, 한국 기업들의 해외투자 증가에 따른 달러 수요 확대, 외국인 투자자의 한국 자산 이탈 등 복합적인 구조적 요인이 작용한다.
 
1997년 외환위기·2008년 금융위기만큼 절망적이진 않지만 대외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에 환율 급등은 비상임이 틀림없다. 가장 큰 타격은 중산층, 서민에게 돌아간다. 원자재와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만큼, 환율 상승은 곧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원·달러 환율이 2% 넘게 오르면서 수입물가지수는 9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밀가루, 과일, 육류, 커피 등 생활필수품 가격 상승은 민생경제 부담으로 직결되며 식품 유통, 건설, 서비스 등 내수산업에는 압박이 가해진다. 반도체, 배터리 등 수출 주력산업은 단기적으로 환율 상승의 이익을 볼 수 있으나 원재료 가격 상승이 맞물린 악재다. 
 
결국 환율 상승의 이익은 전혀 누리지 못한 채, 해외 직접투자 규모만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국내 산업 기반 약화와 경제 성장 둔화의 악순환을 예고하는 셈이다. 외환·금융위기까지 딛고 올라선 우리나라가 왜 이럴까.
 
'원화 가치'를 가치 있게 보지 않는 정책당국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서학개미 탓만 하며 뒤로는 자녀 유학비를 보내거나 글로벌 빅테크 기업 주식을 보유한 관료 얘기를 들으면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한 경제학자는 원화 가치가 대만(TWD), 싱가포르(SGD)에 비해 구조적으로 취약한 점을 꼽고 있다. GDP 대비 외환보유액 비율과 경상수지 흑자 비율 차이가 원화 가치의 취약성을 말해준다.
 
대만달러는 외환보유액 비율이 최소 70% 이상으로 투기 세력이 공략하기 어려운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있다. 싱가포르달러의 외환 방어력은 최소 70% 이상으로 국부펀드 운용 등을 통해 관리한다.
 
그러나 KRW는 지난해 약 22% 수준으로 외환위기 이후 개선된 모습이나 여전히 취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환율뿐이 아니다. 1990년대 일본이 겪은 엔화 약세, 내수 침체, 고령화, 장기 저성장 패턴 등 잃어버린 30년과 흡사하다. 
 
정부가 '4자 협의체' 확대 등 외환 시장 안정화에 나서곤 있지만 결국 땜질식 처방에 불과할 뿐이다. 통화정책 관리 실패를 '서학개미' 책임론으로 방기하지 말고 원화 가치의 대외 신뢰도, 통화의 기초체력 강화를 위한 근본적인 '화폐 주권' 강화가 시급하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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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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