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 쿠데타 1년)비상계엄 여파…정책금융 수장 공백 장기화

산은·수은 장기 공백…기보·신보·HUG는 인선도 미착수
중소기업·주택보증 수요 증가 속 정책 집행력 흔들려
해외는 전문성·견제 강화…한국, 여전히 정무 인사 논란

입력 : 2025-12-02 오후 2:10:38
[뉴스토마토 이지우 기자] 비상계엄과 윤석열씨 탄핵으로 정국 불안이 길어지고 새 정부 조직 개편 논의가 늦어지면서 주요 정책금융기관의 기관장 인선이 대거 지연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민경제의 안전망을 담당하는 기관의 수장이 장기간 부재하면서 비상계엄 결정이 정책금융기관의 독립성과 집행력 저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는 평가가 제기됩니다.
 
2일 현재 주요 정책금융기관 중 비상계엄 이후 새 정부가 출범했음에도 차기 수장이 즉시 선임되지 않은 곳은 한국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기술보증기금, 신용보증기금,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 5곳입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각각 올해 6월과 7월에 행장 임기가 종료됐지만, 후임인 박상진 회장과 황기연 행장은 9월과 11월에서야 임명됐습니다. 
 
산업은행 회장과 수출입은행장은 각각 금융위원장 및 기획재정부 장관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5월 대선 이후 금융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 인사가 8월에야 마무리되고, 7월 취임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초반 재정·예산 대응에 집중하면서 두 기관장 인선이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 것으로 파악됩니다.
 
기보와 신보, HUG는 여전히 차기 수장이 뽑히지 않았습니다. 기보는 작년 11월, HUG와 신보는 각각 올해 6월과 8월에 임기가 종료됐지만 후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HUG는 유병태 전 사장이 2년 연속 경영평가 '미흡'을 받고 물러난 뒤 지금까지 후임이 선임되지 않아 공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HUG의 보증 배수는 올해 3월 73배 안팎까지 치솟아, 보증 한도가 자기자본의 90배로 확대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개정 전 상한이었던 70배를 넘어섰습니다. 수장 부재가 장기화될 경우 이러한 보증 리스크 관리에도 공백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HUG는 10월 임원추천위원회를 꾸리고 사장 후보자 모집을 시작했지만, 신보와 기보는 임추위 구성 이후 별다른 진척 없이 공모 절차조차 시작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한편 경기 둔화가 이어지면서 중소기업의 보증 수요는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기보의 2024년 보증 공급액은 29조145억원으로 전년 대비 5759억원 증가했고, 신보 역시 62조8494억원으로 1조7924억원 늘었습니다. 보증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차기 수장이 부재한 기관들이 정책 대응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됩니다.
 
박상진 산업은행 회장이 지난달 17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별관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의 성공을 위한 금융기관 간 업무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국내는 행정부 편중, 해외는 견제·분산…인사 시스템 격차 뚜렷
 
일부 기관장 인선을 둘러싸고 논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상진 산업은행 회장은 내부 인사이지만 이재명 대통령과 중앙대 법학과 동문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관심을 받았습니다. 박 회장은 국정감사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됐습니다. HUG 차기 사장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최인호 전 민주당 의원은 주택·금융 분야와 직접적 관련이 적다는 점에서 전문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으며, 부산 연고를 이유로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해외 주요 정책금융기관들은 정치적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미국 수출입은행(EXIM Bank)은 이사회 5명 중 동일 정당 출신을 최대 3명으로 제한하고, 최소 1명은 중소기업 대표 출신이어야 합니다. 모든 이사는 대통령 지명 후 상원 인준을 거치기 때문에 특정 정권의 일방적 인사 개입이 어렵습니다.
 
영국 기업은행(British Business Bank)은 정부 소유임에도 회사법 기반의 독립 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캐나다 수출개발공사(EDC)는 민간 전문가 중심의 이사회 구성과 의회 보고 체계를 통해 행정부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공적투자은행(Bpifrance)은 정부와 예금공사가 공동 소유하는 방식으로 단일 부처 종속을 막고, 독일 재건은행(KfW)은 감독이사회와 연방의회가 함께 참여하는 다중 감독 구조를 통해 정치권 개입을 최소화합니다.
 
반면 한국의 정책금융기관은 임추위와 공공기관운영위원회 등 형식적 절차는 갖추고 있으나, 최종 임명 단계가 주무부처 장관 제청과 대통령 재가에 집중되어 있어 인사권이 행정부에 편중돼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정권교체나 부처 개편 시기마다 승인이 지연되며 기관장 공백이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가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황기연 한국수출입은행장이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 서울에서 열린 '2025 개발협력의 날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문성·독립성 흔들린다"…정책금융 인사 지연에 학계 잇단 경고 
 
전문가들은 이번 인사 지연이 정치 변수와 행정 공백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고 진단합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탄핵 이후 조기 대선을 치르고 인수위 없이 정부가 출범하다 보니 초기 수개월간 외교·경제 현안 대응에 인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 과정에서 정책금융기관 인사가 후순위로 밀린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책금융기관이 수행해야 할 기능 측면에서 공백의 위험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공공기관들은 현장의 변화를 정부에 전달하고 정부 결정 사항을 집행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며 "기술·국제 경제 여건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신보·기보·HUG처럼 정책 수요가 빠르게 변하는 기관은 수장이 없으면 추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해외는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원칙적으로 기용돼 정책의 안정성이 유지된다"며 "한국도 전문성 중심의 인사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치권과 관료 조직이 정책금융기관을 '자리 배분의 공간'으로 인식해온 관행도 문제로 지적됩니다. 박상인 교수는 "관료는 퇴임 후 자리를, 정치권은 선거 보상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독립성 강화에 소극적일 수 있다"며 "야당일 때는 독립성을 강조하면서도 집권하면 구조 개편을 하지 않는 패턴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치 환경과 무관하게 의사결정이 가능해야 국가 경제 안전망이 작동한다"며 "독립성 강화를 위한 제도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지우 기자 jw@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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