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경제학엔 기묘한 새들이 등장합니다. 본래의 '백조'가 아닌 '흑고니', '회색 고니' 등 예측 가능의 믿음을 깬 용어들이죠. 이 중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충격을 뜻하는 '블랙 스완(Black Swan)'은 직역하면 '검은 백조'로 불립니다. '흑고니'는 한자어 표현입니다.
표현 방법이 어찌됐던 '흑고니 이론'은 발생 확률이 낮아 예측이 어렵지만 한 번 일어나면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충격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블랙 스완'과 달리 '회색 고니'로 불리는 '그레이 스완(Grey Swan)'은 예측이 가능하나 효과적 대응이 어려운 위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둘 다 백조 색에서 유래한 비유적 표현이자, '백조는 하얗다'는 일반적 상식을 깬 경제 이론이지만 내용면에서는 온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백조라 불리는 큰고니 한 무리가 지난 13일 경남 남해군 선소마을 인근 갈대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흑고니'를 막을 수 있는 경제 운용 해법은 예측 실패에도 무너지지 않는 경제 시스템 능력에 있을 것입니다. 반면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인 '회색 고니'는 일어날 것을 알고도 손쓰지 못하는 사실상 방치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구 소멸은 이미 예견됐지만 사회 시스템의 변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위험이 '회색 고니'와 같습니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인구 절벽은 이미 예견된 리스크입니다.
올해 대한민국 인구 5명 중 1명은 노인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습니다. 오는 2045년이면 내국인 생산연령인구 비중은 53.1%까지 추락합니다. 그 사이 치솟는 고령 비중은 39.8%. 즉, 일을 하는 사람 한 명이 노인 한 명을 업고 가야 하는 세상이 스무 해 뒤 확정될 미래입니다.
2045년 연간 사망자 수도 58만60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더는 '성장'이 아닌 '애도와 정리'의 문화를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는지 현 시점이 '2045년 초상'을 앞둔 회색 고니의 서막이 되고 있습니다.
올 3분기 수도권은 제조업과 서비스업 호조로 3%를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다수 지방이 1% 안팎에 머물렀고 일부 지역은 역성장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회복 국면에서도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26일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한 시민이 핫팩을 손에 쥐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국 경제가 힘들게 경기 회복을 부여잡고 있지만 뒤처진 지역이 따라오기보단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더 이상 동일한 충격을 동일하게 흡수하지 못하는 지역 격차의 편중이 심화되고 있는 겁니다.
지역 간의 성장 격차, 그 자체가 곧 위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격차 구조가 굳어질 때입니다. 성장하는 지역으로 인구와 자본이 쏠리고, 뒤처진 지역은 회복 능력을 잃습니다. 한쪽은 과열되고 다른 한쪽은 붕괴 직전에서 허우적거리죠.
이런 구조는 외부 충격 앞에서 극도로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충격이 약한 고리부터 끊고 그 파장은 전체로 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다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축소사회의 서막 앞에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을 모두가 고민해야 하니까요. 출산율 하락과 고령화, 지역 인구 소멸은 10년 넘게 예측돼왔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알면서도 정치적 비용, 이해관계 충돌, 단기성과 집착 때문에 외면한 결과가 우린 짓누르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학자도, 관료도, 정치인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여전히 시스템과 제도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를 기준으로 작동하는 구조입니다. 학교, 병원, 도로, 재정, 노동시장 모두 성장의 시대에 설계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은 줄고 소비 기반이 약해지며, 재정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질 뿐이죠.
그동안 우린 인구 위기라는 '회색 고니'를 보면서도 언젠가 흰 백조로 변하리라는 막연한 낙관론에 기대어왔습니다. 이제 '성장'이라는 단어는 '적응'과 '회복 탄력성'이라는 단어로 대체될지 모릅니다.
양적 팽창에서 질적 고도화로 가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제언을 통해 충분히 예견할 수 있습니다. 회색 고니의 날갯짓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바람에 휩쓸려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기류를 타고 새로운 사회 시스템으로 착륙할 것인가.
2026년 '병오년(붉은 말띠 해)' 앞두고 남겨진 질문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함께 살아남을 것인가'입니다.
지난 1일 지하철 1호선 서울역사에 직장인들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