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올 한 해 한국 산업계를 덮친 보호무역주의와 관세 폭탄이라는 복합 위기 속에서, 재계 총수들의 행보가 눈에 띄게 활발했습니다. 오랜 기간 대외 활동에 제약으로 작용해온 민형사 이슈가 해소되면서 총수들이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가운데, 현장 속에서 직접 혁신을 일궈내려는 보폭이 더욱 빨라졌습니다. 아울러 일부 그룹을 중심으로 승계 과정이 본격화하면서 ‘오너 3세’ 경영이 전면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울 도심 속 기업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올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오랫동안 발목을 잡아온 민형사 소송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삼성생명 부당합병 혐의에 대해 지난 7월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하며 10년 가까이 이어진 사법 리스크에 종지부를 찍었고, 최 회장의 경우는 10월 ‘세기의 이혼’이라 불린 1조4000억원 재산분할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으로 최악의 위기를 피하게 됐습니다.
'족쇄' 벗은 이재용…광폭 경영
이 회장은 앞서 2월 항소심 무죄 선고 이후 그룹 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행보를 본격화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즉생’ 질책입니다. 이 회장은 3월 임원들에게 “경영진부터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면서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고강도 메시지를 내며 복합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고삐를 조였습니다.
이후 이 회장은 글로벌 ‘빅샷’(거물)들과의 회동 등을 이어가며 삼성전자 위기론 불식을 위해 나섰습니다. 이 회장의 미국 출장을 전후로 삼성전자는 테슬라·애플과 연이어 파운드리 공급계약을 맺었고, 오픈AI의 초거대 AI 인프라 프로젝트 ‘스타게이트’ 반도체 공급에 참여하는 등 전방위적 파트너십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른 실적 반등도 이뤄졌습니다. 3분기 삼성전자는 역대 최대 분기 매출 86조원과 전년 동기 대비 32.5% 증가한 12조1661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습니다.
그동안 멈춰 섰던 인수합병(M&A) 시계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해 잠재 성장성이 높은 분야의 인수 전략에 박차를 가하며 올해만 4차례 대규모 M&A를 단행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2일 삼성전자 화성캠퍼스에서 임직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재산분할’서 한숨 돌린 최태원
천문학적 재산분할 이슈로 그룹 경영권까지 위협받았던 최 회장도 대법원 파기환송 결정 이후 경영 보폭을 확대했습니다. 파기환송심에서 재산분할액이 큰 폭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커지면서 글로벌 경영환경에 대한 대응과 그룹 주력인 AI·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올해 그룹 사장단 인사를 조기에 단행해 내년도 변화 대응에도 주력하면서, 그룹 과제인 리밸런싱 과제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AI 전환 등 미래 사업 방향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는 등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또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 의장을 맡아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이끈 최 회장은, 한일 상의 회장단 회의를 통해 그간 주창해온 한·일 경제 연대 방안에 대한 밑그림도 그렸습니다.
승계로 두각 나타낸 ‘오너 3세’
한편, 올해는 ‘오너 3세’ 경영이 두드러진 해이기도 했습니다. 절친이자 맞수로 꼽히는 ‘오너 3세’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의 핵심으로 꼽혔던 ‘마스가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경영 전반에 성과를 나타내며 그룹 총수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먼저 재계 서열 7위인 한화그룹은 올해 지분 승계 작업이 마무리 되며 김 부회장 중심 체제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앞서 지난 3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지주사 ㈜한화 지분을 김 부회장,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부사장 등 3형제에 증여했습니다. 특히 최근 그룹 지배구조 최상단의 한화에너지 지분을 김 사장과 김 부사장이 일부 매각하면서 김 부회장 중심 후계 구도가 보다 명확해진 모습입니다.
지난 10월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 써밋에서 주요 그룹 총수들과 참석자들이 이재명 대통령의 특별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선·방산·에너지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김 부회장은 올해 ‘마스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사업 성장 포트폴리오에 앞장 서 왔는데, 글로벌 협력·수주 등 잇따른 사업 성과와 함께 중장기 사업의 초석을 다지는 등 존재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도 올해 부회장 승진 1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하며 ‘오너 책임 경영’ 행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정 회장은 10여년간의 사업 실무 경험을 통해 전문성을 쌓아왔는데, 오너 경영의 책임 의식과 맞물려 사업 실행에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가 큽니다. 올해 마스가 프로젝트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 회장은, 향후 조선·건설기계·에너지를 3각 축으로 하는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원팀’으로 관세 넘고 ‘깐부 회동’
올해 총수들은 관세라는 공동의 위기 앞에 정부와 원팀을 이뤄 ‘총력전’을 펼쳤습니다. 대규모 대미 투자 계획을 제시하고 현지 네트워크 등을 통해 정부의 관세 협상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등 관세 협상 타결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민관 원팀’의 활약을 치켜세우면서 “우리 기업인 여러분의 헌신과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울러 경주 APEC CEO 서밋 행사에서 이뤄진 총수들의 현장 경영도 빛을 발했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이재용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그리고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의 ‘깐부 회동’은 올해 산업계 최고의 화제로 꼽힙니다. 이날 회동 이후 엔비디아는 한국 정부와 AI 반도체 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GPU 26만장을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재용(왼쪽부터) 삼성전자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치킨집에서 치맥 회동을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올해 재계 총수들의 행보는 한 단어로 ‘팀 코리아’라 볼 수 있다”며 “과거 은둔의 행보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올해는 총수들이 대외적 노출을 많이 하고 본인들의 활동을 피력하는 등 정부와 원팀의 행보를 통해 관세 인하 등 성과를 도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대미 투자 등을 통해 성과를 냈지만, 상대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국내 산업 환경을 앞으로 어떻게 아우를지가 관건”이라며 “고용 문제, 지방 공동화, 노사 문제 등 여전히 현안으로 남아 있기에, 총수들이 병오년에는 내실을 다지는 측면으로 방향성을 잡고 경영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조언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