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 건강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기름진 고기나 짠 국물을 경계합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식탁 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탄수화물의 색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매일 무심코 먹는 하얀 쌀밥과 부드러운 빵이, 실은 혈관을 망가뜨리는 강력한 ‘스텔스 공격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혈관 건강을 생각한다면 그 핵심 지표인 혈당지수(GI)를 중심으로, 우리가 섭취하는 주요 곡물이 혈관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봐야 합니다.
한국인의 주식인 백미와 서구화된 식단의 중심인 밀가루는 대표적인 고(高) GI 식품입니다. 이들의 GI 지수는 통상 70에서 85 사이를 오르내립니다. 도정과 제분 과정을 거치며 섬유질과 영양소가 깎여 나간 탓에, 섭취 시 우리 몸은 이를 사실상 ‘고체 설탕’으로 인식합니다.
한국인의 주식인 백미와 함께 서구화된 식단의 주요한 식재료인 밀가루는 대표적인 고혈당지수 식품으로 꼽힌다. (사진=뉴시스)
문제는 섭취 직후에 발생합니다. 급격히 치솟은 혈당을 낮추기 위해 췌장은 다량의 인슐린을 뿜어내는데, 이 과정이 반복되면 ‘혈당 스파이크’가 발생합니다. 널뛰는 혈당은 혈관 내피세포를 자극해 미세한 상처(스크래치)를 내고, 그 틈으로 염증 물질이 쌓이게 만듭니다. 남은 잉여 포도당은 중성지방으로 변해 혈액을 끈적하게 만들며 동맥경화를 가속화합니다. 부드러운 식감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역습입니다.
이와 달리 현미와 통밀은 혈관을 지키는 1차 방어선 역할을 합니다. GI 지수가 55~60 수준인 이들은 도정하지 않은 쌀겨와 쌀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거친 식감의 불용성 식이섬유는 소화기관 내에서 탄수화물이 포도당으로 분해되는 속도를 늦춥니다. 마치 도로에 과속 방지턱을 설치한 것처럼 혈당이 천천히 오르게 해, 인슐린 과다 분비를 막고 혈관에 가해지는 산화 스트레스를 줄여줍니다. 백미밥을 현미밥으로, 흰 빵을 통밀빵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혈관의 부담은 크게 줄어듭니다.
‘혈관 청소부’ 귀리, ‘왕의 곡물’ 카무트
최근에는 단순한 혈당 방어를 넘어, 적극적으로 혈관 건강을 개선하는 ‘슈퍼 곡물’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귀리(오트밀)와 카무트입니다.
타임지가 선정한 10대 슈퍼푸드인 귀리(GI 50~55)의 핵심 무기는 ‘베타글루칸’입니다. 귀리를 불렸을 때 나오는 끈적한 점액질이 바로 이것인데, 장내에서 담즙산과 결합해 콜레스테롤을 몸밖으로 배출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즉, 혈관을 막는 주범인 저밀도지단백(LDL) 콜레스테롤을 청소하는 천연 청소부인 셈입니다.
오트밀 형태로 쉽게 섭취할 수 있는 귀리는 베타글루칸이 풍부해 ‘슈퍼 곡물’로 분류된다. (사진=국립식량과학원)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되어 ‘왕의 곡물’이라 불리는 카무트는 혈당 관리의 끝판왕으로 불립니다. 카무트의 GI 지수는 약 40으로 백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카무트에는 강력한 항산화 성분인 ‘셀레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고혈당으로 인한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혈관의 노화를 막는 데 독보적인 효능을 보입니다.
지난해 이루어진 메타분석 연구에 따르면 매일 90g의 통곡물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고혈압 발병 위험이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럽식품안전청(EFSA)의 과학 의견서을 비롯한 많은 임상 데이터들은 하루 3g의 베타글루칸(오트밀 약 한 그릇 분량)을 꾸준히 섭취할 경우, 총 콜레스테롤과 LDL 수치가 유의미하게 감소해 심장 질환 위험을 낮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밥그릇 변화, 10년 뒤 건강 결정
전문가들은 혈관 건강을 위해서는 주식으로 먹는 탄수화물을 ‘정제 곡물’에서 ‘통곡물’로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다만, 평생 백미만 먹던 사람이 갑자기 100% 통곡물로 식단을 바꾸면 소화 불량을 겪을 수 있으므로 처음에는 백미와 잡곡의 비율을 7:3으로 시작해 점차 늘려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입니다.
당신의 혈관은 당신이 오늘 먹은 탄수화물을 기억합니다. 하얀 쌀밥의 달콤함 대신에 귀리와 카무트의 거친 식감을 즐기는 것은 100세 시대에 막힘없는 혈관을 유지하는 확실하고 저렴한 보험입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