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박창욱 기자] 이란 전쟁이 12일째 이어지면서 중동발 에너지·물류 충격이 국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주요국이 사상 최대 규모의 비축유를 풀었지만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오며, 현재 재고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이라는 위기 경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공급 차질이 이어질 경우 당장 다음 달 석유화학업계부터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일 호르무즈 해협을 항해하던 태국 화물선 마유레 나레호가 피격을 받았다.(사진=뉴시스)
비축유 4억 배럴 풀었지만 ‘역부족’
12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32개 회원국이 비상 비축유 총 4억 배럴을 시장에 공급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석유 공급 불안이 이어지며 국제 유가를 낮추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날 ICE선물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배럴당 91.98달러로 전장보다 4.8% 올랐습니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종가는 배럴당 87.25달러로 전장보다 4.6% 상승했습니다.
주요국의 사상 최대 비축유 방출에도, 이란 전쟁 장기화에 따른 원유 부족 우려를 해소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맥쿼리는 보고서를 통해 “4억 배럴은 전 세계 하루 원유 생산량 기준으로 약 나흘 치”라며 “걸프해역을 통과하는 원유 물동량 기준으로는 약 16일 치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스는 “유가 변동성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조기 종전을 언급한 것은 고유가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신호”라며 “고유가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기업 실적에도 하방 압력이 커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날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서는 태국, 일본, 마셜제도 선박 3척이 이란군 공격을 받으며 긴장이 다시 높아졌습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해당 해협 인근에서 피격된 선박은 최소 14척에 달합니다.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 전경. (사진=한국석유공사)
석화·해운, 줄줄이 ‘불가항력’ 선언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 생산시설 가동 중단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 국영 아부다비석유회사(ADNOC) 핵심 시설인 정유·석유화학 복합단지 루와이스 산업단지는 전날 드론 공격으로 정제시설 가동을 일시 중단했습니다. 쿠웨이트 국영석유공사(KPC)를 비롯해 일본 미쓰비시화학, 이데미쓰고산, 인도네시아 찬드라 아스리 등 해외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까지 줄지어 불가항력을 선언하거나 가동 중단에 돌입했습니다. 불가항력 선언은 전쟁·자연재해·정치적 봉쇄 등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해 계약 이행이 곤란해졌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치입니다.
국내에서는
롯데케미칼(011170)이 ‘불가항력 발생 가능성에 대한 통지’라는 제목의 공문을 고객사에 발송했습니다. 롯데케미칼은 “이란의 전격적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 조치로 원료 조달 및 제품 운송 수단 확보가 어려워질 경우 공급 의무 이행이 지연되거나 곤란해질 수 있다”고 안내했습니다. 아직 실제 공급 중단 단계는 아니지만 원료 수급과 물류 차질 우려가 커지며 선제 대응에 나선 것으로 풀이됩니다.
LG화학(051910)도 최근 가소제 제품인 디옥틸 테레프탈레이트 수출 계약에 대해 ‘불가항력’ 가능성을 고객사에 통지했습니다. 앞서 여천NCC가 국내 업계 최초로 불가항력을 선언한 데 이어 대형 석유화학사들까지 관련 조치를 예고한 것입니다.
해운업계 타격도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HMM(011200)은 전날 고객사에 아라비아만·홍해·아프리카 동부 해역 등 중동 항로 화물 운송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중동 지역으로 운송 중인 화물 역시 기존 항로 대신 안전한 대체 항만으로 우회하는 디비에이션(Deviation) 조치를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도착지까지 운송이 어려운 경우 가장 가까운 안전 항구에 화물을 하역하는 방식입니다.
서울 시내 한 주유소에 유류 가격이 게시돼 있다.(사진=뉴시스)
재고 한 달 치…가동 중단 위기감↑
원유 공급 차질이 장기화될 경우 고비는 ‘한 달’이라는 경고가 나옵니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호르무즈 해협 통제로 걸프만 지역에서 공급되는 글로벌 원유 수출량이 하루 1100만~1200만 배럴 줄었다”며 “전략 비축유 방출량 4억 배럴에는 원유 공급 차질이 최소 1개월 정도 이어질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어 ‘최악’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호르무즈 원유 선적 차질이 이어질 경우 한국 정유사의 하루 원유 수입량은 300만배럴에서 160만 배럴로 급감합니다. 국내 정제설비 가동에 필요한 하루 원유 소비량은 297만 배럴 수준으로, 수입량 감소에 따라 매일 137만 배럴의 원유 공급 부족분이 발생하게 됩니다. 지난 1월 기준 민간 원유 재고량인 3821만 배럴로 매일 137만 배럴의 부족분을 헐어 쓰며 기존 설비 가동을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약 28일 만에 비축분이 소진돼 1개월 뒤에는 원유 재고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당장 다음 달부터 석유제품 감산 고비에 직면해 정부 차원의 내수용 비축물량 확대, 유류 할당제 등 적극적인 개입이 불가피해질 전망입니다.
납사를 원료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국내 석유화학(NCC) 업체들의 나프타 보유량은 2~3주 치에 불과합니다. 황 연구원은 “4월 초까지 호르무즈 나프타가 한국에 도착하지 않으면 수입에 의존하는 NCC 설비 가동을 멈춰야 한다”며 “IT 외장재, 자동차 소재, 건축 소재, 섬유 소재 생산업체가 화학 제품 공급난에 시달릴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전쟁이 오늘 당장 중단되더라도 파괴된 시설과 물류망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비축유를 방출해도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한 달 정도에 불과한 데다 이후에는 공급 부족 문제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유가 변동성과 물류 비용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산업계 전반의 생산 비용 증가와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윤영혜·박창욱 기자 yy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