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현진기자] 서울북부지법 서기호 판사(42·사법연수원 29기)의 연임탈락으로 인한 후폭풍이 거세다.
서울서부지법을 필두로 가장 많은 판사가 소속된 서울중앙지법, 서울남부지법, 수원지법 등 수도권 주요 법원들이 판사회의를 열기로 결의하면서 '사법파동'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사법파동이란 사법권의 독립과 개혁을 요구하며 일어났던 판사들의 집단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사법부는 그동안 1971년과 1988년, 1993년, 2003년 4차례에 걸쳐 사법파동을 겪었다. 특히 2차, 3차 사법파동 때는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1988년 김용철 대법원장, 1993년 김덕주 대법원장)이 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바 있다.
이 때문에 사법부 수뇌부는 현재 소장 판사들의 잇따른 판사회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독재권력에 맞서 싸운 1·2차 사법파동
첫 번째 사법파동은 1971년에 촉발되었다.
1971년 7월6일 서울지검 공안부 이규명 검사는 재판부가 제주도로 증인검증을 위해 출장을 갔을 때 변호사들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혐의로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사법부에 대한 공격이라고 보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가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군인·군속 등 특수신분인 경우에는 국가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었는데 대법원판사들이 이 규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린 것이다.
위헌판결 이후 박 정권은 법관들을 끊임없이 사찰해 개인적인 약점을 잡아 공격했고, 박 정권의 사법부 공격은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까지 이르렀다.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37명이 이 같은 검찰의 처사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한 것을 필두로 전국 각지의 법관들은 사법권독립을 주장하면서 150여명의 법관이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로 번졌다.
직접 사태진화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판사들에 대한 검찰수사를 중지하도록 지시하고 담당 검사를 인사조치했다. 사표를 제출한 150여명의 판사들은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의 요청에 따라 사표를 철회했다.
2차 사법파동은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이 5공 당시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하자 소장판사 335명이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촉발되었다.
판사들은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 정보부 기관원의 법원상주 폐지, 법관의 청와대 파견중지,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했다.
판사들의 요구에 의해 그해 6월20일 김용철 대법원장이 퇴진하고 7월2일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는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됨에 따라 낙마했다.
이에 따라 대법원장에 이일규씨가 임명되면서 2차 사법파동은 종결됐다.
◇사법부 개혁·독립 외친 90년대 이후 사법파동
90년대 이후 사법파동은 사법부의 개혁과 독립이 주된 화두였다.
3차 사법파동은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 40명이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하면서 시작됐다.
노무현 정권 시절 대법관을 지낸 박시환, 법무부장관을 지낸 강금실 등 1993년 6월 당시 서울지법 민사 단독 판사들은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제출했다.
판사들은 건의문을 통해 "지난날 사법부의 비겁함을 꾸짖는 역사와 국민들 앞에 참담한 심정으로 속죄한다"면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법부내에 견고한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판사들은 법관인사제도의 개선, 사법부의 관료화 방지, 그리고 법관회의의 제도화를 개선장치로 내세웠다.
판사들이 다시 집단행동에 나선 까닭은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개혁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그해 5월에 대법원이 내놓은 개혁안이 사법개혁을 본격화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변호사단체, 사법연수생들이 동조하면서 힘을 얻었고 결국 김덕주 대법원장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이후 일어난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전문가들에 따라 '사법파동'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붙지 않기도 한다.
이전의 사법파동이 모두 사법부 수장의 퇴임을 이끌었다면 이후의 사법파동은 대법원장의 퇴임을 이끌어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4차 사법파동 혹은 '대법관 임명제청 파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2003년 8월 대법관 임명 관행에 대해 소장 판사들이 반발한 사건을 말한다.
최종영 대법원장이 법원 내 기수와 성별, 법관 중심의 관행에 따라 이뤄지던 대법관 임명제청방식 관행을 고수하자 당시 서울지법 북부지원의 이용구 판사를 비롯한 판사 160여명은 '대법원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건의서를 작성해 항의했다.
판사들이 문제를 제기한 김용담 대법관은 예정대로 인선되었지만 4차 사법파동으로 인해 전국법관회의가 열렸고, 이후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최초의 헌법재판관,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 최초의 대법관이 되는 등 대법관 인선 관행을 바꿔놓았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이던 지난 2008년 형사 담당 판사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다시 촉발됐다.
대법원은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에 착수했고, 신 대법관이 촛불집회의 재판과 관련해 부당한 재판 압력을 가했다며 2009년 3월19일 신 대법관을 대법원공직자 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이후 5월8일 윤리위원회는 신 대법관의 행동이 재판권 침해의 소지가 있음을 인정했고 13일에는 대법원장의 엄중경고도 이어졌다.
하지만 2009년 5월 서울중앙지법, 서울남부·북부지법 등 전국각지의 판사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판사회의를 통해 신 대법관의 행위를 '명백한 재판권 침해'로 규정하는 한편, 신 대법관이 대법관직을 수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판사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신 대법관은 사퇴요청을 외면한채 여전히 대법관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사법파동의 주인공은 '소장파 판사들'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주로 소장파 판사들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소장파 판사들은 30대의 젊은 판사, 부장판사가 되기 이전의 단독판사와 배석판사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단독판사들은 부장판사의 영향력을 받는 합의부 판사들에 비해 단독으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다.
한인섭 서울대학교 교수는 논문을 통해 "40대 이후의 법률가들은 현실에 편입되고 현실 질서를 유지하는 축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면서 "소장 판사들은 기득권보다는 법관으로서의 양심의 무게를 더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밝혔다.
한 교수는 소장 판사들이 집단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소장판사들은 아직 선택지가 넓다. 그들은 판사의 길을 계속 걸을 수도 있고, 변호사가 될 수도 있다"면서 "소장판사의 단계에서 용기와 소신을 꺾이면서 판사직을 계속할 바에는 사법개혁을 위해 결연한 목소리를 내고 다른 길을 걷겠다는 자세를 가졌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서기호 판사의 연임 탈락에 반대하는 판사회의를 주도하는 판사들 역시 단독판사들이다.
서 판사는 15일 뉴스토마토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단독판사들의 판사회의에 대해 "연임심사 과정이 부당하다는 공감대가 이뤄져 있기 때문에 판사회의가 가능한 것이다"면서 "지금 단독판사회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부장판사들도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의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