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경영복귀 2년..‘태종의 內治’

입력 : 2012-04-23 오후 2:37:29
[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한 지 2년이 지났다. 한남동 승지원에 머물던 ‘은둔의 제왕’은 경영복귀 1년여만인 지난해 4월21일 서초동 삼성전자로 첫 출근하며 ‘현장의 제왕’으로 돌아왔다.
 
경영 복귀(2010년 3월24일)로부터 출근 경영까지는 1년여 시간이 더 필요했다. 대통령 단독 특별사면에 대한 여론의 부담이 컸던 탓이다. 사면의 직접적 이유였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회장은 외교에 집중했다.
 
동시에 승지원에서 머물며 고민했던 구상을 펼쳐 보였다. 삼성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의 진작 끝에 나온 결단이었다. 이 회장이 꺼내든 화두는 ‘위기’와 ‘부패척결’로 집약됐다. 위기는 혁신을, 부패척결은 구체제와의 단절을 낳았다.
 
◇쳐다만 보던 ‘애플’..이젠 경쟁체제
 
이 회장은 2010년 3월24일 경영 복귀와 함께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평소 강조했던 ‘샌드위치론’(일본과 중국 사이 끼어있는 한국경제)의 연장선으로,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을 연상케 했다.
 
제2의 혁신이 일어났다. 과감한 투자가 단행됐고 인재 영입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삼성의 신화는 새로 쓰였다. 스마트폰 개념조차 이해 못하던 삼성전자는 2012년 절대강자 애플을 제치고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했다. 모방 속의 혁신이었다.
 
스마트폰은 물론 반도체, 디스플레이, TV 등 각 분야에서 세계1위로 올라섰다. 경쟁력은 가격에서 품질로 이동했다. 한때 세계시장을 호령했던 소니가 쇠락의 길을 걷는 동안 삼성은 발 빠른 변화와 대처로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도 유독 삼성만이 빛을 발했다. 사상 최대 실적이 이어지자 주가는 어느새 130만원을 훌쩍 넘었다. 시장에선 목표가를 200만원으로 고쳐 잡는 등 재평가 물결이 일었다. 이건희의 ‘힘’이었다.
 
◇이학수의 퇴장..신체제와 이재용
 
2011년 12월13일. 이 회장은 연말 정기인사를 통해 이학수 삼성물산 고문을 경영에서 손을 떼게 했다. 2008년 쇄신안으로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났던 이 고문이 이날 인사로 삼성을 완전히 떠나게 됐다.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꿔가며 10년 넘게 그룹의 컨트롤타워를 자임해왔던 그룹 2인자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이 고문과 투톱을 형성했던 김인주 삼성카드 고문은 재무 전문성이 인정돼 삼성선물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룹 전반에 관한 영향력은 내려놓아야만 했다.
 
구체제의 종식은 신체제의 등장을 의미했다.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이 그룹 전반을,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제조 분야를 책임졌다. 이들은 이 회장만을 보필하던 이전의 투톱 성격에서 벗어나 미래의 삼성, 이재용호에 대한 구상을 진작시켰다.
 
그룹 관계자는 “힘의 이동 정도가 아니라 삼성의 체제 자체가 바뀌었다”며 당시 인사를 설명했다. 기존의 관성을 허물고 새로운 그룹상을 만들기 위한 이 회장의 결단이었다. 고민의 중심에는 단연 후계자,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있었다.
 
◇태종의 ‘내치’..미래 삼성의 기반
 
이 회장의 경영 복귀 2년은 태종 이방원을 연상케 했다. 강력한 군주제, 신권을 누른 왕권, 안정된 내치가 그러했다. 이는 훗날 아들 세종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었던 근간이 됐다.
 
이 회장 역시 경영에 복귀하며 단칼에 신권(측근·구체제 인물)을 제어하며 빠르게 삼성을 안정화시키고 미래로의 길을 열었다. 전자의 고공행진 앞에 내재됐던 계열사들의 열등감은 삼성이란 이름 앞에 자부심으로 전환됐다. 각 사마다 글로벌 경쟁력에 조직 역량을 쏟아 붓게끔 했다.
 
이 회장 스스로 “회의 때마다 같은 소리를 떠든다”고 말한 것처럼 끊임없는 채찍질을 통해 그룹 전체를 자극했다. 격 없는 소통과 칼 같은 엄벌이 상존했다. 특히 내부 비리에 대한 그의 단호함은 흐트러졌던 기강을 다잡기에 충분했다.
 
이 회장은 특히 내치에 있어서 태종을 빼닮았다. 목적하는 바도 같았다. 삼성의 르네상스를 위해 오너로서의 영향력과 역량을 현 시대에서 모두 소진하겠다는 거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삼성은 조선왕조를 닮았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조선의 안정과 부흥은 태종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삼성을 창업한 이래 현 삼성의 명망은 이건희 회장이 이룩한 성과다.
 
두 사람 모두 창업주로부터 권력을 승계할 장남이 아니었다. 태종은 자신의 칼에 피를 묻히며 태생적 한계를 극복했고, 이 회장은 선대 회장의 간택을 받았다. 삼성에서 후계구도에 대한 장남과 차남의 반발이 극심했던 점을 감안하면, 정도의 차이일 뿐 권력구도를 뒤흔들 왕자의 난으로 비화될 수 있었다.
 
이 회장이 최근 큰형 이맹희씨와의 유산 분쟁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단순한 재산다툼이 아니라 삼성의 '경영권'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계 뚜렷..거스를 수 없는 시대요구
 
한계 또한 뚜렷했다. 최근 불거진 공정위 조사 방해 파문 앞에 삼성은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1조원에 달하는 형제들 간의 유산 분쟁은 세간의 이목을 삼성가(家)로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재현 CJ그룹 회장에 대한 미행 건마저 터지는 등 악재의 연속이었다.
 
이는 삼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시각을 고착화시켰다. 젊은 층에게 취업 1순위로 선호되는 우리나라 대표기업인 동시에 사회적 비판을 한몸에 받는 괴리가 이어졌다. 삼성이 내놓은 제품에 환호하면서 삼성이 지배하는 구조와 문화에 대한 지적 또한 끊이질 않았다. 잊혔던 ‘삼성공화국’이 회자되고, 심지어 법 위에 군림하는 기득권의 표상으로까지 공격받는다.
 
1등을 배척하는 시기와 질투로 치부하기엔 사회적 요구, 시대흐름과 분명 엇박자가 있다. 삼성이 고민해야 할, 이 회장이 극복해야 할 삼성의 과제다. 삼성이기에 엄한 잣대가 적용되고, 삼성이기에 더 많은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기업’. 삼성이 광고에 내걸었던 기업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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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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