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앵커: 삼성전자 글로벌 경영전략회의가 오늘로 3일간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당초 계획된 일정을 보름 이상 앞당기면서 진행됐는데요, 글로벌 경제위기를 대하는 삼성의 긴박감이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취재기자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기성 기자 자리했습니다. 김 기자, 역시 회의의 화두는 ‘위기 대응 전략’이 아니었겠습니까.
기자: 네. 그렇습니다. 사실 기업의 경영전략은 극비입니다. 외부, 특히 경쟁사에 노출될 경우 매출과 시장구도에 직접적인 타격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현재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 역시 대략적인 윤곽에 그치고 있습니다. 일종의 퍼즐 맞추기인 셈인데요, 이 경우 출발점을 향해 역으로 되짚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지난달 24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이날 3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이 회장은 귀국길에 기자들과 만나 “유럽 경제가 생각보다 나빴다”면서도 “수출에는 다소 영향이 있겠지만 삼성에게 큰 영향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자신감으로 받아들였죠.
그런데 내부 기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룹 고위관계자는 “뒤집어서 보면 ‘삼성만큼은 지장 없도록 하라’는 오너의 강한 주문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2주 뒤 이 회장은 수뇌부 인사를 전격 단행합니다. 전자를 이끌던 최지성 부회장을 신임 미래전략실장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권오현 부회장을 전자의 새 사령탑에 임명했습니다. 유럽 구상이 체제 변화를 통해 현실화된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로벌 경영전략회의. 말씀하신 대로 일정까지 앞당기며 소집한 데는 단순한 정례회의가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이 회장의 위기경영이 삼성을 또 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봐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입니다. 느슨해진 조직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혁신이라는 생명줄을 잡고 다시 살아오라는 뜻이라는 거죠.
앵커: 그렇다면 전략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쉽게 넘길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구체적 내용이 전해진 게 있습니까.
기자: 회의는 크게 DS(Device Solutions)와 DMC(Digital Media & Communications), 두 부문으로 나뉘어져 진행됐습니다. 특이할 점은 첫날 DS 부문 회의 내용만 간략하게 브리핑됐을 뿐, 둘째 셋째 날 회의내용은 일체 흘러나온 게 없다는 점입니다.
앵커: 어떻게 봐야 하죠.
기자: Device Solutions의 약자인 DS는 반도체를 비롯한 부품 분야입니다. 권 부회장이 진두지휘했던 전문 분야로, 그는 삼성을 오늘날 반도체 왕국으로 일군 그룹 내 최고 권위자입니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권 부회장은 이날 ▲지속적인 연구 개발 활동을 통한 기술 리더십 확보 ▲생산성 향상을 통한 경쟁력 차별화 ▲신규라인 건설을 통한 제조 경쟁력 우위 유지 ▲마켓 센싱 역량 강화를 통한 유연한 시장 대응 등을 주문했습니다.
얼핏 보면 일반적 내용 같지만 전문가의 냉철한 시각이 담긴 시장 주도성을 역설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마디로 현 시점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거죠. 반도체 업황 침체로 일본의 엘피다가 파산하는 등 메이저 업체들이 막다른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시장구도를 삼성 1강 독주체제로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봤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막강한 자본력에 축적된 기술력, 여기에 비메모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신규 투자까지 이뤄질 경우 사실상 타사와의 경쟁 자체가 무의미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DMC, 즉 TV와 휴대폰 등 완제품 세트 분야에 관한 논의내용은 공식적으로 전해진 게 전혀 없습니다. 애플 등 경쟁사와의 시장 주도권 쟁탈이 워낙 치열한데다 천문학적 금액의 특허전까지 맞물려 있어 일체 회의내용을 비밀리에 붙이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트 분야가 최지성 체제 하에서 전자의 캐시카우로 자리한 만큼 쉽사리 지시사항을 대외에 알리기에는 부담이 됐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때문에 DMC를 구성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접근보다는 큰 틀에서의 경영전략 점검과 위기 대응책 마련에 몰두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앵커: 그렇군요. 총체적으로 이번 전략회의를 평가해주시죠.
기자: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에 이끈 뒤에도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권 부회장이 전략회의 첫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진정한 글로벌 톱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쉼 없는 도전과 혁신이 필요하다.” 이 말이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한 회의 참석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위기를 뚫는 힘은 결국 경쟁력이다.” 그의 말대로 정도(正道)를 택한 겁니다. 첩경은 없다, 경쟁력만이 유일한 돌파구이며 해법이라는 얘기죠.
다만 방법에 있어 유동성 확보 등 소극적 대응보다는 투자와 기술 혁신 등 공격적 경영으로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이 이번 회의의 요지로 보입니다. 위기에 대한 대응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내비쳤습니다. 특히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하는 유럽의 재정위기는 쉽사리 넘길 대목이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이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 그간 세계경제를 견인했던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신흥국들의 성장 또한 크게 둔화되는 양상입니다. 당장 제품 수요의 급감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 현지 법인에서 모여든 책임자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삼성의 승부수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지난 20일 전략회의를 앞둔 수요사장단 회의에서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기 대응의 기본 원칙은 ‘Back-to-Basics’, 즉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이 말도 빼지 않았습니다. “악화된 환경에서도 경쟁력 있는 기업은 생존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양적 경쟁에서 질적 경쟁으로, 혁신을 단행한 게 오늘날 삼성전자를 이끈 원동력이었다는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얘기입니다.
삼성의 힘이 느껴진, 그 힘을 재확인시킨 3일간의 회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