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주몽이 모세를 능가하는 새로운 판타지가 탄생할 수 있을까?
국립극단의 올 하반기 프로젝트는 꽤나 도발적이다. '2012삼국유사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5편의 창작극을 연달아 발표한다. 한국 최고의 고전인 삼국유사를 통해 21세기 연극의 서사전략을 재발명하겠다는 포부다. "20세기의 역사는 삼국유사가 구약성서에 졌다. 지금부터는 주몽이 모세를 능가하는 판타지가 나와야 한다"는 백남준의 발언이 이번 기획의 중요 모티브가 됐다.
다만 삼국유사의 '재현'보다는 '재해석'이 될 예정이다. 9일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국립극단이 한국연극계에 의미 있는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면서 "삼국유사를 동시대 작품으로 재탄생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낭독공연을 통해 공개된 몇몇 작품들을 보니 모두 현재와 비슷한 시대적 특성을 지니고 있거나, 인물의 원형성이 드러나는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유사가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의 의미로 쓰여진 책인 만큼, 물질만능주의로 흐르는 현대사회에도 의미 있는 경종을 울릴 것으로 기대된다.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펼쳐지는 이번 프로젝트에는 국내 유명 극작가와 연출가가 대거 참여했다. 김명화 작, 최용훈 연출의 <꿈>, 홍원기 작, 박정희 연출의 <꽃이다>, 최치언 작, 이성열 연출의 <나의처용은밤이면양을사러마켓에간다>, 김태형 작, 박상현 연출의 <멸>, 차근호 작, 양정웅 연출의 <로맨티스트 죽이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 춘원 이광수의 욕망과 좌절 다룬 <꿈>
오는 9월1일부터 16일까지 연극 <꿈>이 참가작 중 가장 먼저 관객을 만난다. 한국적 모더니티를 실험하는 극작가 김명화는 이번에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친일분자라는 오명이 붙은 춘원 이광수의 죄의식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사람의 욕망과 금기, 깨달음을 가감없이 그린다.
작품을 집필하다 가슴이 아파 울기도 했다는 김명화 작가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 시대였다. 시대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일연이 조명 받기 시작했다"고 운을 뗀 후, "우리에게 지금은 나라가 있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며 집필 의도를 밝혔다.
◇ 수로부인 설화 뒤집는 <꽃이다>
<꽃이다>는 9월22일부터 10월7일까지 공연된다. 귀신도 용도 탐을 내어 납치했다는 수로부인에 대한 궁금증으로 창작을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얼마나 누구보다 예쁘다는 거야?'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호기심을 바탕으로, 수로의 미모가 조작되었다는 상상 하에 한바탕 정치극이 펼쳐질 예정이다.
극작가 홍원기는 "연극은 오래된 거울"이라면서 "공연을 보는 지금의 관객들이 '지금 우리 얘기 아니야?'라는 기시감을 느끼며 시대와 역사에 대해 인식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 한국남자 트라우마 건드리는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라는 긴 제목의 연극은 10월13일부터 28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공연소개 글에서 최치언 작가는 '술에 취해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걷는 한국 남자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처용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연출을 맡은 이성열은 "삼국유사를 현대적 삶 속에 넣어서 새로운 처용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며 "용서와 관용 사이에서 진동하는 처용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 왕가의 몰락을 그리는 <멸>
'삼국유사 기이 제2' 중 <김부대왕> 편을 다룬 <멸>은 11월3일부터 18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김부대왕>은 경순왕, 마의태자, 낙랑공주가 나오는 원전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이미 익숙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묻고 탐험한다. 극작가 김태형은 "천년 역사를 지닌 신라가 망하는데 그 대목이 굉장히 짧게 느껴졌다"면서 "역사는 대의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찌질하고 작은 욕망으로 움직이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연출가 박상현의 설명에서 공연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보다 분명히 느껴진다. "신라 멸망은 천지개벽과 비견할 만한 일이 아니었을까? 10.26사태 때 내가 19살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했다. 그때는 한 사람만 대통령 하는 줄 알았던 시기"라면서 "모든 왕족과 권력의 교체를 생각하다 결국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대신한다'는 가설을 세웠다"고 말했다.
◇ 어느 낭만주의자의 죽음을 다룬 <로맨티스트 죽이기>
'삼국유사에서 문제적 인물을 찾았다'는 작가의 설명대로 이 작품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린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 중 주인공 비형랑이 아닌 귀신 길달에 주목한다.
소재는 삼국유사이지만 스타일이나 분위기는 현대적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연출가 양정웅은 "당시 신라가 고속성장 중이었다고 하더라. 풍요 속에 정신적 가치를 잃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며 "극 중 4명의 현실주의자와 길달이라는 낭만주의자가 등장하는데 결국 낭만주의자는 살아남기 힘들고 현실주의자만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라고 작품을 간략히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