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뛰고 또 뛸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 울고 웃다, 또 다시 울었다. 감정 기복이 하루 세 차례나 변할 정도로 시련이 컸다. 경제민주화가 대선 주요 의제로 떠오르면서 동네북으로 전락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8일 표정이다.
오전 10시30분.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전경련을 찾았다. 유력 대선주자 중 처음이었다. 정치부, 산업부 기자들로 19층은 이미 빼곡했다. 경호요원들까지 들어서면서 웅성임과 함께 긴장감이 커졌다. 안 후보는 곧장 허창수 회장 등 회장단이 자리한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정병철 상근부회장을 비롯해 회장단 일원인 이준용 대림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김윤 삼양 회장 등이 손님을 맞이했다.
허 회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투자 증대와 함께 동반성장 및 사회공헌을 다짐했다. 본론이 이어졌다. 허 회장은 “이를 위해서는 기업들이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경제계의 불안 요소를 막아내고 산업의 경쟁력을 지켜나갈 수 있는 정책들을 많이 발굴해 줬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끝으로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만큼 이 같은 경제계의 바람을 공약과 정책에 잘 반영해 주리라 믿는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안 후보의 짧은 답변이 뒤따랐다. 그는 “경제민주화 정책에 대해 재계의 반대가 강한 것 같다”며 “걱정은 이해하지만 뜻은 경제를 살리게 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진 요구. “지금 정치권과 검찰에서도 국민 요구에 따라 스스로 개혁안을 내놓고 있다”면서 “전경련에서도 정치권의 안에 대해서 반대 의사만 표하기보다 스스로 개혁안을 내놓을 때”라는 주문이었다. 간결했고 힘이 있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기자들 사이에서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반대나 요구만 하지 말고 재계 스스로 개혁안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50여분간 이어진 비공개 면담 역시 그리 좋지만은 않은 분위기였다고 몇몇 배석자들이 전했다. 안 후보를 따라 자리한 박선숙 공동선대본부장과 장하성 국민정책본부장의 공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전경련 관계자가 귀띔했다. 한방 세게 맞은 것이다.
오후 2시30분. 이번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의 간담회가 예정돼 있었다. 장소는 대한상의회관이었다. 대한상의, 무역협회, 한국경총, 중기중앙회 등 주요 경제단체 수장과 함께였다. 경제5단체장이 유력 대선주자와 마주 앉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누리당마저 보수정당의 틀을 벗고 경제민주화를 주창하는 상황인지라 부담감은 여전했다. 허 회장으로선 오전의 악몽이 떠올랐을 법 했다.
생각보다 순탄했다. 박 후보는 발언 내내 ‘부탁’ ‘감사’ 등의 표현을 써가며 재계를 존중했다. 압박 또한 ‘양보’ ‘자제’ 등의 말로 순화했다. 특히 “경제민주화 관련해서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이 있다”면서 “특정 대기업 때리기나 국민과 기업 편 가르기를 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고 5단체장의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주안점을 뒀다. 그러면서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 자신의 경제민주화라고 규정했다.
무엇보다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순환출자 금지 관련해 “기존 순환출자는 기업의 자율에 맡기고, 신규 순환출자는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의결권 제한 등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대규모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해 김종인 등 당내 경제민주화 주창론자들과 현격한 입장차를 보였다. 또 복지 재원에 대해서도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늘리는 건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박 후보는 마무리 발언을 통해 “불필요한 규제는 없애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기업과 현장 목소리를 들어서 정책을 실천하겠다”며 “당내에는 여러 의견이 있기 마련이지만 오늘 제 입장은 명백하게 밝혔다”고 못을 박았다. 당연히 분위기는 화기애애, 좋았다고 배석한 조윤선 선대위 대변인이 전했다.
오후 5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30층 아폴로 룸. 올해 마지막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열렸다. 허 회장은 박 후보가 예상외로 시원한 답변을 내놓은 것에 대해 만족감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수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특히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가 내건 재벌개혁에 대해선 봉쇄의 필요성을 절감해야만 했다.
회의 참석자는 허 회장을 비롯해 총 8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정준양 포스코 회장, 이준용 대림 회장, 강덕수 STX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등 매번 회의 때마다 같은 얼굴이었다. 이건희(삼성), 정몽구(현대차), 최태원(SK), 구본무(LG) 회장 등 이른바 ‘빅4’ 총수는 이날도 어김없이 불참했다. 해외출장과 공판 등 개인 일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올 들어 이들의 참석은 전무했다.
21명으로 구성된 회장단의 평균 참석자는 7~8명으로, 출석률은 30% 중반대에 머물렀다. 구본무 LG그룹,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전경련의 혁신을 요구하며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삼성, 현대차, SK마저 사실상 발을 끊으면서 전경련의 대표성은 추락했다는 게 안팎의 공통된 목소리다. 일각에서는 허 회장의 리더십 부재를 질타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 구조에서는 누가 리더가 되더라도 마찬가지라는 볼멘소리도 제기됐다.
급기야 해체론, 무용론까지 나왔다. 더욱이 여야 할 것 없이 저마다 경제민주화를 꺼내들면서 각 그룹별로 각개약진이 펼쳐졌다. 괜히 나서서 대열로 전선을 꾸리기보다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는 게 이들의 속내다. 한 고위임원은 “분위기도 안 좋은데 나서서 (여론의) 뭇매를 자처할 필요가 있느냐”며 “그러다 대선주자에게 소위 찍히면 누구 책임이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전경련은 스피커로 전락한 지 오래”라며 “앞에서 회원사들 입장만 반영하면 된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전경련을 이끌어온 허 회장으로서는 이래저래 불편하고 속이 쓰린 시련의 하루였다. 허 회장은 내년 2월로 임기 2년을 끝내게 된다. “힘들었다”는 그의 취임 1년 소회가 여지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