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아기자] 미국과 유럽의 잇따른 경기부양과 일본 아베 신조 정부의 노골적인 '엔저(低)' 정책으로 세계 환율시장에 전운이 감돌면서 한국 경제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주요 경제국들이 자국 환율을 낮추기 위한 실력행사에 돌입하자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의 통화가치는 상대적으로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대응방안에 대한 시장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지만 정부의 대응은 소극적이다.
특히 수출 중소기업이 아우성이지만 외환당국은 최근 환율 변동에 우려를 나타내는 몇 차례 구두개입에 나섰을 뿐 급속히 떨어지는 환율하락에 대한 이렇다 할 대응 방침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
21일 정부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 수출 경쟁국인 일본 엔화가치는 2010년 6월23일 이후 2년7개월 만에 달러당 90엔대로 떨어지는 등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
이는 일본 아베 총리의 '엔화 약세 정책'에 따른 것이다. 아베 총리는 자민당 총재 시절인 지난해 11월 "일본의 디플레이션과 엔고 탈출을 위해 윤전기를 돌려 화폐를 무제한 찍어내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경기를 띄우겠다"고 밝히며 아베노믹스를 구체화했다.
이에 따른 원·엔 환율은 급락을 포함해 지난해 4분기 이후 원화가치가 전세계 주요 통화 중 가장 높은 절상률 5.2%를 기록했다.
'원고·엔저' 추세가 지속되자 엔고·대지진 등으로 실적이 악화됐던 일본 수출기업들은 잔칫집 분위기인 반면, 한국 수출기업들은 울상이다.
실제 지난 17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열린 'CEO 무역현장 위기대응포럼'에 참석한 한 중소기업 대표는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에겐 지금 환율급락이 가장 큰 부담이다"며 "지금대로라면 수익이 작년보다 20%는 줄어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500개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환율 하락시 ▲이미 체결된 수출계약물량에 대한 환차손 발생(76.4%) ▲원화 환산 수출액 감소로 인한 채산성 악화(51.4%) ▲수출단가 상승으로 인한 가격 경쟁력 악화(26.0%) 등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원·엔 환율이 1% 하락하면 국내 총수출도 1% 가까이 줄어든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원·엔 환율이 1% 하락하면 국내 총수출이 0.92%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고 있는 철강·석유화학·기계산업의 경우에는 수출이 각각 1.31%, 1.13%, 0.94%씩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LG경제연구원도 엔화 환율이 지난 2008년 수준인 달러당 110엔까지 오르면 한국 수출산업 전반에 충격이 가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도 외환당국은 몇 차례 환율 변동에 대한 우려 짙은 목소리를 담은 구두개입에만 나설 뿐 원화값 급등세에 뾰족한 대책은 물론, 이렇다 할 대응 방침도 없어 보인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일 "환율 쏠림 현상이 걱정된다"며 "적극적이고 단계적인 대응방안을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말해 구두개입이 나섰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6일 "환율 변동폭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도록 허용하는 중앙은행은 없다"며 "엔화 가치 하락으로 환율 변동성이 확대될 경우 필요시 적극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시장은 달아 올랐다. 일각에서는 정권 이양기에 금리·환율·재정 등 주요 거시경제 정책이 사실상 실종됐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쏟아내고 있다.
또 새 정부의 기조가 확정될 때까지는 큰 정책을 시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기준금리를 더 낮추거나 원화매입을 꾀하는 외국인 자금에 대한 건전성 규제를 강화하는 등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원화강세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며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외환시장 안정화 대책과 함께 한국 통화정책 방향성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당분간 달러화 약세, 엔화 약세, 원화 강세가 지속될 것"이라며 "우리나라 외환당국은 환율 결정을 시장에만 맡겨두기 보다는 정책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 경제를 크게 보더라도 장기적으로 경상수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의 환율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 연구위원은 "외환보유액을 늘려가거나 외환 규제, 토빈세 등을 통해 환율의 하락 속도, 원화 강세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