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또 먹기 싫은 것을 먹어야 하는 경우의 상실감과 불쾌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합니다.
우스게 소리같지만 한국사람들이 입버릇 처럼 말하는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는 말들은 먹는 것이 곧 죽음과 연결돼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먹는 것에 대한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이 집단으로 몰려 있는 곳이 있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우리나라 이야깁니다. 그것도 우수한 인재들을 모아놓은, 월급들도 적지 않게 받는 공무원들의 이야깁니다. 바로 정부세종청사 이야깁니다.
굳이 과거 '보릿고개'나 배고픈 시절 얘길 꺼내면서 배부른 이야기를 한다는 분들도 있겠지만 내가 먹기 싫어도 그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진다면 생각은 좀 달라질겁니다.
정부세종청사에 근무하는 5500여명의 공무원들은 먹는 것에 대한 자유를 빼앗긴지 벌써 두달이 됐습니다.
먹기 싫은 것이야 안 먹으면 그만이라지만 이 곳 세종시에서는 통하지 않는 논리입니다. 처음 군대간 신병훈련소 훈련병들의 모습도 아니고 나이 지긋이 드신 관록있는 공무원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세종청사나 그 인근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청사 구내식당이 아니면 인근 공사장(청사공사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어서)에 있는 건설현장 식당(함바집)을 이용해야 하고, 그마저도 싫다면 차로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40분까지 이동해서 대전이나 조치원까지 가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왕복에 드는 시간은 굳이 계산하지 않으렵니다. 그마저 시간 낭비일테니까.
선택권은 구내식당, 함바집, 외지식당 등 세가지로 압축됩니다.
청사내 구내식당은 모두 4곳인데요. 모두 합쳐서 1500석 규모에 불과해서 국무총리실,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국토해양부, 농림수산식품부, 환경부 등 6개 부처 5500명의 공무원들은 한번에 밥을 먹기는 어렵습니다. 최소 3번 이상은 순번이 돌아야 가능합니다.
때문에 가장 편리한(?) 청사 구내식당을 선택할 경우에는 제 때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제한된 자리에 많은 인원이 몰리기 때문에 11시반을 전후해서 남들보다 빨리 밥을 먹으러 나오거나 12시반을 전후해서 남들보다 늦게 밥을 먹어야만 식판을 들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서야 하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습니다.
특히 구내식당을 이용할 경우에는 맛있는 점심이나 저녁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한끼만 먹어보면 알거든요.
모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구내식당의 한끼 식사비용은 3500원. 정부과천청사 등 다른 정부청사 구내식당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제품의 품질은 동급 최하라는 것이 세종청사 공무원들의 한결같은 평가입니다.
최근 "밥맛 없다"는 공무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냉동식품을 줄이는 등 메뉴를 조금 개선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구내식당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이곳 공무원들의 마음입니다.
다음으로는 청사를 둘러싸고 한창 툭탁거리고 있는 건설현장의 일명 `함바집`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곳을 선택할 경우에는 청결한 환경에서 먹을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함바집의 한끼는 4000원으로 구내식당보다는 좀 비싸지만 맛은 좀 더 낫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500원을 더 주더라도 맛있는 밥을 먹고 싶은 공무원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깨끗한 구내식당과는 달리 지저분한 환경이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건설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보니 탁자며 식당내부며 흙이 묻어나는 것은 예삿일이지요. 그 정도야 뭐 감수할 수 있죠. 비교적 맛있는 밥이 기다리고 있다면야.
문제는 공무원들이 현금을 그다지 애용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구내식당보다 줄이 짧고 맛이 조금 더 있다는 점은 커다란 위안이지만 카드로 결제하면 어김없이 4400원을 받습니다. 물가를 잡고, 세금을 조정하는 공무원들의 위상은 이미 사라졌지만 밥 사먹는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아예 행패에 가깝습니다.
세상 일 모르는 시골 사람들이 찾아온 돈벌이 기회를 잡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지만 여기 밥먹으러 오는 공무원들이 뭘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400원 더 받으려다 400만원, 4000만원 벌금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가까운 훗날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역시 가장 큰 일은 밥먹는 일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바로 이래서 생겨난 말 같습니다. 밥을 먹어야 일을 해도 할텐데, 밥조차 제대로 안먹이고 일을 어떻게 시킬런지 걱정입니다.
새 대통령 취임이 20여일 남았군요. 대통령이 오셔서 밥이라도 한끼 드셔야 할 것 같군요. 함바집에서 4400원주고 카드 한번 긁어 보시는 것도 민생경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정부세종청사는 아직 구글맵에서조차 검색이 안될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에 있습니다. 조치원이나 대전 유성, 멀리는 공주까지는 가야 그나마 구색을 갖춘 식당들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런 외부식당을 이용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주로 부서별 단체 회식이나 고위공무원들이 기자들과 단체로 식사를 할 때나 가끔 가게 되지요. 아예 오후 업무는 늦게 처리하거나 미루는 것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려야만 다녀올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밥먹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랍니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11시에나 출발해야 1시 이전에 청사로 복귀할수 있습니다. 좀 늦게 되면 2시가 돼서야 다시 책상에 앉을 수 있기 때문에 선택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선택이 잘못될 경우는 맛난 식사는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에 단체로 공주에 있는 불고기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간 기획재정부 공무원은 음식이 너무 짜게 나와서 불평을 했지만, 역시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 먼 곳까지 가서 감히 불평을 하다니요. 앞으로는 그냥 드세요. 청사에 남은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정안전부가 최근 뒤늦게 식당가 증설 등 세종청사 편의시설 확충방안을 내 놓은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 더 견뎌야 하는 것이 힘들긴 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공무원들의 업보인걸요.
먹는 즐거움을 빼앗긴 듯 미각이 둔감해진 세종청사 공무원들이 하루빨리 먹는 즐거움을 되찾길 소원합니다. 며칠 굶다 맛본 걸인의 밥이 진수성찬 못지 않듯 이 시절이 훗날 두고두고 이야기거리로 남겠지요.
다만, 혹독한 현실이 시급히 고쳐져야 좋은 추억으로 훗날 회자될 수 있습니다. 지금 세종청사 공무원들의 가장 큰 이슈는 먹는 것이겠지요. 겉으론 아니겠지만 적지 않은 분들이 속으론 공감하리라 확신합니다.
먹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일하기 위해 겨우겨우 먹는 요즘의 현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추억은 악몽이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지요. 이 시절의 기억이 부디 추억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