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나는 MTV 세대'라는 말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지휘자 크리스티안 예르비는 21일 서울시향과의 '플래티넘 시리즈I' 공연에서 발을 구르고 어깨를 움직이는 등 시종일관 역동적인 몸짓으로 지휘하며 색다른 매력을 뽐냈다. 젊은 단원 비율이 높은 서울시향과 크리스티안 예르비의 궁합은 나쁘지 않았다.
에스토니아에서 나고, 미국에서 자란 크리스티안 예르비는 '지휘 명문가'의 막내다. 치밀한 스타일의 아버지 네메 예르비, 격동적인 분위기의 형 파보 예르비와 비교되는 것은 크리스티안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아버지, 형과 비교할 때 크리스티안 예르비는 악상의 연속성에 중점을 두며, 현대음악에 강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티안의 음악적 특징은 이날 브람스의 곡으로 꾸려진 프로그램 중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77번'보다는 '대학축전 서곡'과 '피아노 4중주곡 제1번g단조 작품번호 25번(쇤베르크의 관현악 편곡)'에서 빛이 났다.
먼저 대학축전 서곡으로 무대가 시작됐다. 브람스가 독일의 브레슬라우 대학에 선물한 이 곡은 브람스 곡 중 드물게 밝고 유쾌한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크리스티안 예르비는 첫곡부터 힘 찬 발구르기를 선보이며 분위기를 잡았다. 바이올린과 목관부의 조용한 들썩거림, 금관의 부드러운 음색, 유연하게 흐르는 현의 선율, 파곳의 생기 넘치는 연주를 지나 팀파니와 타악기, 관현악이 한꺼번에 어우러지며 장대한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러운 흐름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그러나 두번째 곡인 바이올린 협주곡은 느린 박자 탓인지 다소 지루했다. 특히 협연자로 나온 바이올리니스트 아라벨라 슈타인바허의 경우 에너지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슈타인바허는 1716년 제작된 '부스'라는 이름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악기 특유의 화려한 음색이 특히 고음부분으로 올라갈수록 두드러졌지만 감성보다는 기술이 뛰어난 연주 스타일 때문인지 곡 본연의 사색적 분위기는 실종됐다. 음정도 다소 높게 잡힌 느낌이었다.
휴식 후 이어진 피아노 4중주곡 제1번 g단조 작품번호 25번(쇤베르크의 관현악 편곡)은 원곡의 진중한 이미지에다 목관과 타악을 더해 구조적인 재미를 더하는 작품이다. 크리스티안 예르비의 주특기를 엿볼 수 있는 곡으로, 적절한 다이내믹을 바탕으로 음악적 구조를 구축해내며 지휘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특히 오보에 이미성 수석과 전 서울시향 수석 클라리네티스트 채재일 등 목관 파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1악장에서 어두운 기운의 주제부가 클라리넷을 시작으로 반복적으로 연주되다, 다시 오보에를 시작으로 신비로운 분위기의 2악장으로 넘어간 후 3악장부터 서서히 밝아진다. 4악장은 집시풍의 분위기가 압도했다. 목관악기 파트와 현악기 파트가 탬버린 반주를 바탕으로 재치 있고 빠른 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등 화려한 악상을 그린 이후 모든 파트가 정열적으로 힘을 합해 마침내 피날레를 이룬다.
첫 내한 공연에서 크리스티안 예르비는 놀랄 만한 깊이나 서정성보다는 설득력 있는 짜임새로 승부하는 지휘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날 공연은 예르비 가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석 매진을 기록했지만 막상 연주회에서는 아버지나 형의 그림자가 그리 짙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