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 (사진제공=NC다이노스)
[뉴스토마토 이준혁기자] 프로야구단 SK 와이번스의 홈구장인 문학구장 남쪽에 있는 문학산은 인천 남부의 주산으로 불린다. 높이는 해발 217m로 높지 않지만, 주변에 고구려 건국자 동명성왕(주몽)의 장남인 비류가 도읍을 잡았고, 이후로 조선시대에 인천 광역권을 맡는 도호부청사터로 쓰였다. 문학산 아래의 향교에서는 지역 출신의 인재가 다수 배출됐다.
'문학'은 '학(鶴)이 서식하는 산'이란 의미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런 문학산의 아래에서 지난 31일 오후 한 마리 학이 날아올랐다. 비록 SK가 아닌 타팀 선수지만, 탈삼진 12개를 곁들인 당당한 투구로 상대를 꽁꽁 묶으며 구단 최초의 완봉승을 기록한 이재학이다. 그는 구단 투수기록 다수의 최초를 써내면서 '1호 사나이'로 불려왔고, 이날도 완봉의 최초를 적었다.
◇안타 2개 내주고 탈삼진 12개 빼앗아
이날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경기에 홈팀 SK를 막는 상대팀 NC의 선발투수로서 나선 이재학은 9이닝에 걸쳐 2피안타 12탈삼진 무사사구 완벽투를 기록했다. 타선은 3점을 얻었고, 결국 이날 경기는 본인의 프로 데뷔 이래 최초의 완봉승이자 NC의 창단 최초 완봉승으로 기록됐다.
NC의 투수가 영봉승을 기록한 적은 있다. 지난 7월2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찰리 쉬렉과 이민호 등이 호투하며 2-0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렇지만 NC에게 투수 한 명이 기록한 완봉승은 전례가 없던 경사다.
SK의 톱타자 정근우를 투수 땅볼로 잡으며 첫 아웃카운트를 쓴 이재학은 이후로 신들린 투구를 선보였다. 흔한 땅볼, 뜬공, 삼진 등은 물론 낫아웃, 견제사 등 다양한 형태로 SK 타자를 잡았다. 위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적절하게 대처하며 실점없는 호투를 이었다.
이재학은 2회 박정권과 박진만에게 각각 볼넷과 안타를 내줘 2사 1, 2루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뒤이은 정상호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내 고비를 넘겼다.
시간이 갈수록 이재학의 컨디션은 좋아졌다. 3회에는 정근우를 직선타로 잡아냈고 4회와 5회는 타자 6명을 17개의 공으로 돌렸다.
결국 이재학의 이날 5회 누적 투구수는 50구(1회 7구, 2회 18구, 3회 8구, 4회 9구, 5회 8구)에 불과했고 그 순간까지 이재학은 삼진을 6개나 잡았다.
후반에도 이재학의 호투와 삼진쇼는 계속됐다. 특히 2-0의 불안한 리드를 지키던 7회는 이날 하이라이트였다. SK의 클린업 트리오로 불리는 최정-박정권-한동민의 방망이를 모조리 헛돌게 만들었고, 특히 홈런 2위인 강타자 최정에게 헛스윙 3개를 이끄는 위력을 뽐냈다.
결국 이재학은 9회말 박정권을 맞아 이날 113번째 공을 파울 플라이로 유도하며 결국 경기를 승리로 마쳤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은 이재학은 마침내 뿌듯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면서 대기록의 완성을 자축하고 긴장을 내려놓았다.
◇"욕심 버리고 평정심 찾자 공이 좋아졌다"
이재학은 이날 경기에서 2회 2사 이후부터 9회 1사 상황까지 타자 20명을 연이어서 범타로 처리하며 상대를 철저하게 제압했다. SK 타선이 점수를 낼 빈틈을 주지 않았다. 2회와 9회에 각각 2사 1, 2루 실점 위기가 왔지만 대처를 잘했다.
이재학의 주무기는 직구의 움직임과 흡사하게 들어가다 홈베이스 앞에서 떨어지는 공인 서클체인지업이다. 팔이 풀리자 체인지업은 더욱 늘었다. 그는 이날 직구(41개)보다 체인지업(52개)을 더 많이 던졌다. 이밖에도 슬라이더 17개와 3개의 투심을 더했다.
결국 이재학의 상대 타자들은 무기력한 방망이를 휘둘렀다. 체인지업 때는 방망이가 빨리 돌았고 직구에는 스윙이 늦게 나왔다. 체인지업이 먹히자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아웃 카운트를 유리하게 적립했고 상대가 체인지업을 예상할 무렵에는 직구로 허를 찔렀다.
3회부터 5회까지 연속 10구 안에 승부를 끝낸 모습도, 6회 삼자범퇴와 7회 상대 중심타선 전원 탈삼진도 모두 이재학의 호투로 이뤄졌다. 점점 공격적 승부로 더욱 위력을 가미한 공을 던졌고 곧잘 먹혔다. 높거나 밋밋한 공은 거의 없을 정도로 제구도 절묘했다.
이재학은 경기 초반에 대해 "경기 초반 체인지업의 각도가 잘 나오지 않아 슬라이더와 직구 위주 투구를 펼쳤다"고 말했다. 이어 체인지업에 대해선 "직구가 워낙 잘 들어가 체인지업도 잘 됐던 것 같다. 앞선 두 경기가 안 좋아 심혈을 다해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발 첫승에 완투, 완봉승까지 기록해 기쁘다. 직구가 워낙 좋아서 변화구도 잘 먹힌 것 같다"면서 "9회에 이상하게 심박수가 더욱 빨라지더라. 급해진 것 같았는데 (김)태군이 형이 '차분히 하라'고 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신인왕? 아프지 않고 이닝 많이 이끌고 가는 투수 되고싶다"
이재학은 NC의 토종 에이스로 유력한 신인왕 후보다. 하지만 잠시 흔들릴 때도 있었다.
이재학은 선발로 자리를 잡아가던 6월 초순 김경문 감독에게 마무리로 전환할 것을 통보받았다. 손민한이 선발로 투입되며 결정된 조치로, NC의 불안한 불펜을 이재학을 통해 타개하려던 김경문 감독의 승부수였다.
그렇지만 이재학은 불펜으로 이동한 후 등판한 3경기에서 총 5이닝동안 무려 5점이나 줬다. 선발로서 쌓은 올시즌 초반 안정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결국 김 감독은 이재학에게 다시 선발투수의 보직을 돌려줬다. 그는 선발로 돌아온 이후 7월 한 달간 총 4경기에 나서 26⅓이닝동안 자책점을 8점만 내줬다. 시즌 방어율도 2.96으로 양호하나 이달에는 2.73으로 낮다.
이재학은 충분히 신인왕을 노려볼 만하다. 프로야구 신인왕의 자격 요건은 당해 연도를 제외한 5년 이내의 선수로 투수는 30이닝 이내를 던져야 한다.
'중고 신인' 이재학은 2010년 두산에서 16경기에 등판해 23⅓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5.01, 1승1패를 기록한 것이 1군 등판 기록의 전부다. 이후 이재학은 2011시즌 종료 후 실시됐던 2차 드래프트로 NC에 입단했다.
그는 신인왕에 대해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경기가 잘 안 풀린다. 긴 이닝을 던지는 투수가 되고 싶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이재학은 팀의 창단 첫 승에 이어 첫 완봉승도 가져가며 NC 구단 역사 첫 페이지를 연이어서 자기 이름으로 장식하고 있다.
마무리로서 잠시 부진했지만 선발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은 이재학, NC 팬들의 토종 에이스로 팀의 희망이 되고 있다. 마산구장 뒷편 무학산을 훨훨 날아오를 멋진 학으로서, 그리고 듬직한 공룡으로 앞으로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