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동훈기자] "나이 들수록 조바심이 생깁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찾아봐야 할 곳도 많은데 세월은 저리도 지나 버리고 맙니다. 대단한 욕심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추하지 않게, 정갈하게 늙고 싶은 것이 나의 꿈입니다. 나는 '개관사정(蓋棺事定)'을 좌우명 삼아 스스로 경계를 삼고자 합니다. 개관사정이란 사람의 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닫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김모 씨는 지난 2월 이런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그는 지난해 여름 항암 치료를 중단했다. 치료 대신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하는 길을 택했다. 자연에 가까운 집으로 거주지를 옮겨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지인들도 만났다. 장례 절차도 꼼꼼하게 계획했다.
고인의 장례식에서 후배 교사 장모 씨는 유언장을 읽었다. 약력 낭독과 사진 자료로 그의 지난날을 살피는 시간도 이어졌다. 장례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고인의 지인이었다. 그들은 고인이 생전에 부탁했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웰 다잉' 확산
◇한 상주가 장례식장 앞을 배회하고 있다.(사진=뉴스토마토)
김씨와 같이 '웰 다잉(well dying)'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웰 다잉은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뜻한다.
장례 절차는 미리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남은 삶은 병원이 아닌 곳에서 가족, 지인 등과 함께 알찬 시간을 보내는 것 등을 계획한다.
김씨의 계획된 장례식에 참석한 것으로 계기로 후배 교사인 장씨 또한 웰다잉을 준비하게 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우리 부부의 장례 계획에 대해 미리 알렸다"며 "무덤은 한 시기에는 추념의 장소로 요긴할지 몰라도 후대에는 만만찮은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기업에서 30여 년간 일한 유모(66세)씨는 정년 퇴임 전후로 가족와 지인들의 장례를 겪으며 웰 다잉을 계획하게 됐다. 그는 "어머니 장례식장에 동생 쪽 지인이 더 많이 나타나자 체면을 생각하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이후 유씨는 장례식에서 동년배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죽으면 장례식 하지 맙시다"라고 말한다. 그는 "내가 죽으면 화장한 뒤 어머니 계신 곳에 뿌리라고 두 아들에게 전했다"며 "그렇게 하면 아들이 죽은 나를 보러 올 때 할머니도 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언장, 장례계약서 작성해 둬야
교통사고나 질병 등 특별한 계기를 통해 웰 다잉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5년차 직장인 임모 씨는 "최근 교통 사고를 겪은 뒤 남은 삶을 어떻게 살고 장례 방식을 생각해봤다"며 "화장을 하고 유해를 자연에 뿌리는 방식, 장례에 부를 사람, 장기 기증 등을 고려해봤다"고 말했다.
사회 초년생인 이모 씨도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보잘 것 없는 내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던 끝에 장기 기증을 하기로 결정했고, 내 장례식에는 어떤 사람을 초대할지도 고민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웰 다잉을 준비하면 개인의 삶을 차분히 정리하는 의미도 있지만, 특히 사후 장례와 관련한 불필요한 갈등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박태호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 "죽음은 나이순이 아니다"라며 "유언장이나 장례 계약서를 구체적으로 작성해둬야 남은 가족들의 혼란이나 갈등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웰다잉은 문화
외국에서 웰 다잉은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장례는 간소한 규모로 치러지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가 절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성 마틴대의 스노우 블레인 교수(62세)는 "영미권의 장례식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태가 아니다"라며 "대개 간소하게 치러지는데 조문객들이 고인의 시신 앞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례 비용은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주변의 경우를 보면 2000달러 이상 쓰는 것 같다"며 "조문객에게서 받은 부의금은 장례 비용에 쓰기보다는 각종 자선 단체 등에 기부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장례지도사협회(NFDA)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인의 평균 장례 비용은 7045달러(한화 약 744만원)으로 우리의 절반 수준이다. 미국은 1인당 국민소득(GNP)이 우리나라의 2배 수준이지만 우리처럼 장례에 과도한 비용을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선진국은 국가 주도의 장묘 시설도 발달돼 있다. 이 때문에 장례 준비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면 웰 다잉을 고려할 여유가 생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묘지와 화장장을 지난 2000년부터 세금으로만 운영하고 있다. 공동묘지는 25년 시한부로 사용할 수 있고 연장도 가능하다. 스톡홀름 시민, 외국인 등 누구든 원한다면 공동묘지에 묻힐 수 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가면 지상 아파트처럼 세워진 콘크리트 묘실 '니초'가 있다. 한칸에 입주하는 데 드는 비용은 한화로 15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는 유골을 산이나 바다에 뿌리는 자연장도 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