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우리은행과 예금보험공사가 쥐고 있는 '뜨거운 감자'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우리은행이 16일 지난해 '어닝쇼크'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향후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마련한 기자회견장에서다.
이날 이종휘 행장은 우리은행과 예보가 체결한 양해각서(MOU)의 내용이 "너무 가혹한 것 같다"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예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고난의 행군'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예보가 제시한 경영목표를 달성하는 게 쉽지 않다는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행장은 명동 우리은행 본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재 분기별로 진행되는 우리은행에 대한 경영실적 평가를 반기로 조정하는 내용을 예보에 건의했다"고 밝혔다. 또 "앞으로 2년간 적용될 MOU의 점검 주기를 분기에서 반기로 변경하면 단기 실적 위주의 영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현 상황이 '비상시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행장은 "시장이 안정된 상황에서는 비교적 (향후 경기에 대한) 예측이 쉬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2년간을 예측해보면 정말 불확설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향후 경제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이지만, 이같은 발언은 경기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한 상황에서 예보가 제시한 경영목표 달성이 녹록치 않다는 심경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 우리은행의 '원죄' 공적자금 수혈.."그래도 너무한다"
우리은행과 예보의 '악연'은 MOU가 체결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2000년 제정된 공적자금관리특별법(공적자금법)은 MOU의 밑바탕이 된다.
공적자금법은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관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사용과 회수, 관리 등을 위해 마련된 법으로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들이 예보와 "경영정상화 계획의 이행을 위한 서면약정"을 맺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를 통해 회생한 금융기관인 만큼 공적자금 손실을 최소화하고 기업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일정 부분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우리은행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부실을 떠안은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합병을 통해 탄생했다. 정부는 예보를 통해 우리금융지주에 12조70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이중 8조7000억원이 우리은행을 살리는 데 투입됐다.
물론 우리은행도 공적자금을 통해 살아날 수 있었다는 데 십분 공감하고 있다. 이 행장은 이날 "우리은행은 국민이 만들어준 은행"이라며 우리은행이 혈세를 통해 되살아났다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은행 내부에서는 예보와 체결한 MOU를 '족쇄'로 여기는 인식이 은연 중 확산돼 있다. 올 2월 현재 우리금융에 대한 예보의 지분율이 72.97%에 이르지만 여타 시중은행과 경쟁하며 수익을 거두는 만큼 은행의 자율성을 보다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같은 인식은 2000년대 이후 입행한 젊은 행원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게 은행권 안팎의 설명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어차피 일선 영업점에서 고생하는 것은 똑같다"며 "우리은행에 대한 예보의 간섭이 지나친 측면이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 예보 "우리銀 주장 적절치 않다"..법개정이 먼저
현재 예보와 우리은행이 체결한 MOU에 따르면 우리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10%를 넘어야 하며 순고정이하여신비율은 1.0% 이하, 총자산이익률(ROA)은 0.8%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또 1인당 조정영업이익은 3억원을 넘어서야 하며 조정영업이익 대비 판매관리비용은 45.8% 이하로 관리돼야 한다.
실제로 예보는 우리은행이 지난해 3분기 이같은 경영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자 기관과 경영진에 '주의' 조치를 내렸다. 이에 따라 이종휘 행장을 포함한 임원들은 성과급 가운데 4.5%를 삭감당했다. 지난해 4분기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만큼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 예금보험위원회가 우리은행측에 4분기 실적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예보측은 이 행장의 주장을 일축했다.
예보 리스크감시지원부 관계자는 "점검 기간을 분기에서 반기로 확대하자는 주장은 MOU를 통한 목표부여 자체가 부담이 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며 "은행을 포함한 기업들은 실적을 분기별로 릴리스(공개)하는 것이 원칙이고 이를 통해 기업 가치와 주식 가치가 평가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분기별 실적 공개라는 자본시장의 원칙이 있는데 여기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적자금을 통해 회생한 금융기관 입장에서 이 행장의 주장은 적절치 못하며, 분기별로 시장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장기업이 이같은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분기별 경영실적 평가라는 원칙이 공적자금법 제17조에 명시된 만큼 MOU에 문제가 있다면 법개정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게 예보측의 입장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은행의 주장이 정치권의 공감을 얻어 법률 개정 논의가 시작된다 할지라도 실무자의 의견을 묻는다면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못박았다.
예보의 또 다른 관계자는 "황영기 현 KB금융 회장도 우리금융 회장 재임 당시 MOU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며 "당시에는 우수한 실적을 내세우며 우리금융이 정상화됐다는 논리를 폈는데, 이제 와서 동일한 MOU를 두고 '상황이 어렵다'는 정반대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 예보의 조직논리.."갈등은 계속된다"
전문가들은 예보의 이같은 반응에 대해서도 속사정이 있다고 진단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금융시장에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자 '예보 역할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며 "예보 입장에서도 조직의 존립근거를 강화하기 위한 명분을 쌓을 수 있는 소재가 바로 우리은행을 포함한 우리금융"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형 금융회사 중 현재 예보가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우리금융이 유일하다. 한때 '저축은행 컨설팅 기관'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했던 예보가 우리은행 등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경우 조직 규모와 기능 확대에 대한 명분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MOU가 체결된 과정과 현재 양 조직간 입장을 살펴볼 때 우리은행이 민영화돼야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며 "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만큼 MOU를 둘러싼 불협화음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뉴스토마토 박성원 기자 want@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