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 은행들이 올초 달러를 구하기 위해 해외에서 발행한 달러표시 외화채권에 국민연금 등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투자자로 참여해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차익을 남기기 위해 저금리 원화로 달러를 조달해 고금리 채권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환당국과 전문가들은 이런 행태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의 단적인 사례라고 비판했다.
◇ 국내 기관, 국책은행 외채에 투자
26일 외환당국, 은행권 등에 따르면 수출입은행이 지난 1월 중 해외에서 발행한 20억 달러의 글로벌본드의 투자자들 중에 국내 일부 기관투자가들이 1억 달러 가량을 배정받았다. 또 산업은행이 1월에 발행한 20억 달러의 글로벌본드 투자자들 중에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5억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국내 일부 대형 보험사와 자산운용사,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글로벌본드 투자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당시 10억 달러를 조달하러 해외에 나갔으나 무려 44억 달러 규모의 투자주문이 몰리는 등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았다"고 말했다.
더구나 이번에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발행한 5년 만기의 달러화 채권의 발행금리는 8%를 웃도는 고금리여서 싸게 원화를 들여 채권을 매입하면 적어도 1~3%포인트 금리의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산은 관계자는 "수익률 측면에서 보면 8~9%를 웃돌기 때문에 국내 금융기관들도 고금리 투자 수익을 얻기 위해 참여했다"며 "해당 채권은 유통시장에서 더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도 "주로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스와프거래를 통해 원화를 주고 달러를 조달해 해외 채권 발행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번에는 발행금리가 높아 기관투자가들이 투자에 참여만 해도 앉아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산업은행의 채권 발행 때 일부 참여했으나 1억 달러를 밑돈다"며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에 신용등급이 높은 채권에 한해 조금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원래 보유중인 달러 등으로 투자했다"며 "어지간한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대다수 참여했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권은 일단 이번 글로벌본드 발행에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참여한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수출입은행 관계자는 "국내 투자자들의 참여 여부는 주간사들이 결정하는 것"이라며 "법.규정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고 언급했다.
◇ 모럴해저드 논란
전문가들은 국책은행의 외화조달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책은행들이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과 다르다. 산은이 조달한 20억달러 가운데 무려 25%에 해당하는 5억달러는 해외조달이 아니라 국내조달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외환당국의 관계자는 "기관투자가들이 국책은행의 외화표시 채권을 매입하는 것은 왼쪽 호주머니에서 오른쪽 호주머니로 옮기는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도 "국책은행이 발행한 외채를 자국 금융기관이 샀다는 것은 우스운 것"이라며 "외화를 조달한 의미가 퇴색된다"고 지적했다.
기관투자가들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발행 채권을 사들이는데 투입한 달러의 출처에도 의혹이 일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관투자가들은 해외에서 채권을 사들일 경우 환위험 회피를 위해 시중은행과 스와프 거래를 통해 달러를 조달한다. 문제는 시중은행들이 갖고 있는 달러의 상당부분은 한국은행이 공급한 외환보유액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 정부와 한은이 작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5개월여 간 시중에 푼 외화유동성은 521억5천만 달러에 달한다. 한미 스와프 자금 300억 달러 중에서 163억5천만 달러를 활용했고, 나머지 358억 달러는 외환보유액으로 공급했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액은 작년 9월 말 2천396억 달러에서 올해 1월 말 2천17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은행들은 한은으로부터 지원받은 달러를 주로 외화차입금을 상환하는데 사용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돈에는 꼬리표가 붙어있는 것이 아닌 데다 차입금 상환으로 생기는 여유자금은 결국 한은 지원에 의한 것인 만큼 외환보유액이 국책은행 채권 매입에 투입됐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행태를 비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일부 금융권 관계자들은 글로벌 금융시장 부진 속에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상황에서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8% 이상의 고금리 채권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