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승근기자] 국내 선사들이 설 자리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다. 자본력에 따라 시장이 재편될 것이라는 우려마도 나오고 있다.
중견·중소선사는 물론 국내 대표 선사들마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알짜사업들을 하나둘 매각, 해외 선사들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형 화주들의 해운업 진출 길이 열리면서 물동량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경쟁력이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서 자본을 앞세운 대형 화주들과의 싸움으로 일감마저 줄게 됐다는 게 선사들의 토로다. 실제 업계에서는 현 상황을 생존 명운이 걸린 총체적인 위기로 판단하고 있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 유동성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시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즉각적인 정부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여기에 정부가 대형 화주들의 해운업 진출을 사실상 승인하면서 이제는 개별 기업을 넘어 업종 전체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는 앞서 지난 6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인수·합병(M&A)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포스코, 현대제철, GS칼텍스, SK에너지, 에쓰오일 등 해외에서 원료를 대량 수입하는 화주들이 M&A 시장에 나온 해운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단 일감몰아주기 등 부작용을 막기 위해 자가 화물 운송비중을 30%로 제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자가 화물 30% 룰’은 의미가 없는 조항이라고 주장한다.
전체 운송 비중의 30%만 넘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전체 운송 화물량을 늘리면 얼마든지 조항을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대형 화주들의 물동량을 운송하는 30~40개 중소 선사들은 일감 부족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대부분의 대형 화주들이 대기업 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에 계열사나 협력사를 동원, 저가수주 정책을 앞세워 손쉽게 물동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우려 중 하나다. 이렇게 될 경우 지난 2009~2011년 저가수주가 횡행했던 조선업과 같은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물동량 확보를 위해 수익성을 포기하다 보면 결국에는 공멸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기존 선사들은 대부분 대형 화주들과 장기 운송 계약을 맺고 있는데, 이 물량이 빠져나갈 경우 업황의 변동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완충지대가 사라진다는 점도 문제다. 장기 운송 계약은 시황에 따른 운임 변동과 관계없이 꾸준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들에게 불황기를 버틸 수 있는 일종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일례로 대부분 장기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가스선 전문 선사인 KSS해운의 경우 극심한 해운업 불황 속에서도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꾸준히 10%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업황과는 대비된 실적을 보였다.
한편 정부가 대형 화주들에게 해운업 진출의 물꼬를 터줬지만 현재 매물로 나온 팬오션의 매각 작업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팬오션은 이달 초 삼일회계법인을 매각 주관사로 선정하고 본격적인 매각작업에 나섰다.
그동안 부실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장기용선계약의 상당 부분을 털어내 부담을 덜었고,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에서도 팬오션을 인수해 조기 경영정상화에 나설 전략적 투자자가 있을 경우 인수자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매각 가치가 높아진 상태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인수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업황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낮기 때문이다. 국내 몇몇 사모펀드와 현대차그룹의 현대글로비스가 유력한 인수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움직임은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팬오션 부실에 대한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지만 국내 선사들은 인수 여력이 없고 대형 화주들은 아직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며 “현재로서는 사모펀드가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M&A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대형화주들의 해운업 진출을 사실상 허용하면서 해운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사진=뉴스토마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