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석진기자]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이 급격하게 하락하면서 경기 부양책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제성장률까지 둔화돼 이대로 가다간 일본식 잃어버린 10년에 빠질 것이란 우려마저 제기됐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이번 통화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 인하와 마이너스 예금금리, 장기대출 프로그램 등 다양한 디플레이션 방지 카드를 꺼낼 것으로 보고 있다.
◇5월 물가상승률 0.5%..디플레이션 우려 '급증'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중앙은행(ECB)이 오는 5일 정례 통화정책회의를 하루 앞두고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다양한 경기 부양책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저성장과 저소비, 저물가 등 3대 악재가 겹친 가운데 경제 성장의 근간인 고용시장까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유럽 당국자들의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장기화 된 저물가 문제다.
실제로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달 유로존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예비치는 전년 동기 대비 0.5% 오르는 데 그쳤다. 이는 예상치이자 직전월 수치인 0.7% 보다 낮은 수준이며 4년여 만에 최저치다.
◇유로존 물가상승률 추이 2013~2014년 5월(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유로존의 목표치인 2.0%에서 더 멀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로존 CPI 상승률은 지난해 10월부터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말마따나 유로존의 물가 수준은 '위험구역(the danger zone)'을 맴돌고 있다.
물가 하락세가 이어지면 재화의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을 예상해 가계는 소비를, 기업은 투자를 줄인다. 이는 자연히 성장 둔화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경기침체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최근 이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15일 유로스타트는 유로존의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예비치가 전 분기 대비 0.2%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시장 전망치인 0.4%의 절반에 불과한 성장세다.
고용과 대출 시장 분위기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지난 4월 유로존의 실업률은 역대 최저치에 근접한 11.7%를 기록했고 같은 기간 민간대출은 전년 동기보다 1.8% 감소했다.
여기에 유로화 강세 문제가 재부각되면서 경기침체 우려감은 더욱 커졌다. 대출이 줄면 유동성이 또한 감소해 유로화 가치는 더 올라간다. 독일의 공영방송 도이치 벨레(DW)는 유로화 가치가 주요국 통화대비 10% 고평가됐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유로화 가치가 높아지면 수출 상품 가격이 올라 경상수지가 악화되기 십상이다. 다른 국가와의 가격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ECB, 기준금리 0.10%로 인하·마이너스 예금 금리 도입 전망
최근 경제 지표를 종합하면 ECB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강력한 부양책이 도입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제니퍼 맥퀸 캐피탈이코노믹스 이코노미스트는 "성장률이 0%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며 "기준금리를 낮추는 등의 조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하는 ECB의 전통적인 부양 카드다. 현재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치인 0.25%인데, 이번 회의를 통해 금리가 최대 0.1%까지 더 내려갈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젠스 올리버 니크래쉬 바덴 뷰르템베르크란데스방크 스트레지스트는 "기준금리가 0.15~0.10%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고 로이터폴은 0.10%로 내려갈 것으로 내다봤다.
◇유로존 기준금리 추이 2013~2014년 5월 (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더불어 마이너스 예금금리가 최초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 인하만으로는 불안한 시장을 달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꽤 오랫동안 0.25%란 역대 최저치의 기준금리가 이어졌지만, 나라마다 적용 수위가 다르다는 점 또한 기준금리 인하 정책의 한계점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기업들에 5.4%의 대출금리를 물고 핀란드와 프랑스는 각각 2.2%를 적용하고 있다.
제임스 애슐리 RBC 캐피탈 마켓 이코노미스트는 "이제는 정말 경기 부양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만약 적당한 선에서 경기 부양 조치가 종료된다면 시장은 이게 전부냐고 반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너스 예금금리가 시행되면 은행들이 ECB에 돈을 예치해 놓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대출이 촉진되는 효과가 난다.
주요국 중앙은행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영국 영란은행(BOE), 일본 중앙은행(BOJ)도 이 정책은 아직 도입하지 않고 있다. 이 수법의 효용성에 관해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책인 셈이다.
그만큼 ECB의 경제상황이 전례가 없는 통화정책을 고려할 만큼 다급하다는 뜻인데,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국가들은 이미 마이너스 예금금리를 시행하고 있기는 하다.
◇ECB, 부양카드 '다양'..양적완화 시행 가능성은 낮아
ECB가 낼 수 있는 카드는 이 밖에도 저금리 장기대출(LTRO), 채권 불태화를 중단 조치, 미국식 양적완화 등이 있다.
LTRO는 이미 2차까지 시행 중인데, 1차 LTRO의 만기 시한이 내년까지라 이번에 3차를 단행해도 큰 무리는 아니라는 평가다.
LTRO는 ECB가 자금난에 빠진 유럽 은행들에 1%대의 저금리로 3년간 돈을 꿔주는 제도로, 기업의 대출을 유발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아울러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통화정책회의에서 ECB가 채권 불태화를 중단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채권 불태화는 중앙은행이 채권매입액과 같은 양의 유동성을 흡수해 통화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조치를 중단하면 시중에 통화량이 늘면서 양적완화 같은 효과가 생긴다.
전문가들은 이 방식으로 시중에 1750억유로를 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중앙은행이 직접 자금을 시중에 공급하는 양적완화 조치 또한 거론되고 있다. 다만, 이 방식은 비교적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이 이 방식을 꺼리고 있는 데다 어떤 자산을 매입해야 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다.
WSJ은 "중앙은행이 대규모의 자금을 푸는 정책을 매우 두려워하는 독일 국민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양적완화 시행 가능성은 낮다"고 진단했다.
이런 가운데 ECB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란 소수 의견도 있었다.
로랜드 보벨 민하임 대학 경제학 교수는 "경기침체 위기가 종료돼 특별한 조치가 따로 필요없는 상황"이라며 "전체적으로 유로존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