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정부가 올해말 세계무역기구(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를 앞두고 국민 의견을 모으는 공청회를 열었다. 정부와 국책연구원, 농업계 등이 모였지만 서로 이전투구만 계속한 끝에 아무 대안도 찾지 못한 공청회(空聽會)가 됐다.
20일 산업통상자원부와 농림축산식품부는 경기도 의왕시 한국농어촌공사에서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를 열고 "국내 쌀 소비량이 매년 감소하는데 관세화를 미루며 쌀 의무수입량을 늘리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담"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사실상 쌀 시장을 개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농업계는 "정부가 협상을 통해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데도 쌀 시장 개방을 기정사실로 하고 농민들을 기만하려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정부는 공청회 시작 전부터 행사장에 경찰을 배치하고 사전에 방청신청을 한 사람들만 출입시켜 자유로운 토론을 막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미처 방청권을 못 얻은 농민들은 공청회장 진입을 시도하며 정부 관계자,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가 쌀 시장 개방 논리로 제시한 자료의 타당성을 놓고도 격론이 벌어졌다.
정부 측 발제자인 송주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미 쌀 시장을 연 일본과 최근 관세화 의무를 한시적으로 유예한 필리핀을 언급하며 "우리에게는 쌀 시장 개방과 관세화를 잠시 미루는 대신 수입의무량을 늘리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형대 전농 정책위원장은 "정부는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WTO 이해당사자국과 어떻게 협상했고 어떤 정보를 모았는지 공개하지 않은 채 매번 일본과 필리핀 사례만 언급하고 재탕삼탕한 자료, 표절한 통계만 쓴다"고 반박했다.
박 정책위원장은 또 "2005년 박흥수 전 농림부 장관과 2009년 장태평 전 장관은 쌀 관세화 유예에 대해서는 협상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발언했지만 지금 정부는 당시의 입장을 뒤집었다"며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쟁점을 왜곡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농업계 내에서도 쌀 관세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전농과 달리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는 '현실적 관점'을 언급하며 정부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것. 이후 전농과 한농은 한동안 '앞잡이', '매국노' 식의 욕설이 오가는 말싸움을 벌였다.
이날 공청회는 오후 2시30분부터 3시간 넘게 진행됐지만 쌀 관세화에 대한 진전된 대안을 찾지 못했다. 정부는 농민의 불신만 얻었고 대외 협상력 부재라는 숙제만 안게 됐다. 농업계 역시 내부적으로 합의를 찾지 못했다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공청회를 참관한 서모씨(56세)는 "나도 농민이지만 공청회는 참 실망스럽다"며 "정부는 그동안 정부만 믿고 기다려온 농민을 배신했고, 농민단체는 정부 주장에 꼬투리만 잡는 것 외에 20년 동안 쌀 시장 개방을 막을 방법조차 못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이번 공청회를 바탕으로 이달 말 쌀 관세화에 대한 입장을 확정하고 9월까지 WTO에 이를 통보할 계획. 정부와 농업계가 생산적인 대안 없이 갈등만 반복하는 동안 300만 농민의 생계가 걸린 쌀 시장 개방 문제를 결정할 시간이 하염없이 다가오고 있다.
◇20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한국농어촌공사에서 열린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에서 패널들이 각자 의견을 말하고 있다.ⓒNew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