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다음날(5월 12일) 서울 삼성병원.ⓒNews1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비보는 한밤 날아들었다. 5월10일 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자택 인근 순천향대병원에서 심폐소생술(CPR)을 받은 뒤 곧바로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어 새벽에는 막힌 심혈관을 넓혀주는 심장 스텐트(stent) 시술을 받았다.
이후 이 회장은 뇌와 장기 조직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저체온 치료 끝에 수면 치료에 돌입했다. 일반병실로 옮겨졌다지만 외부와의 접근이 차단되는 VIP 병실이다. 삼성은 "회장님의 병세가 상당히 호전되고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7개월이 훌쩍 흘렀다. 이 회장의 의식 회복은 '아직'이다.
재계를 상징하는 이 회장이기에, 그의 건강문제는 늘 주목받았다. 과거 폐질환으로 수술을 받았고, 이로 인해 추워지는 겨울이면 따뜻한 하와이나 오키나와를 찾았다. 장기간 그룹을 비워두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이번처럼 직접적 위기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동시에 삼성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표면적으로는 이 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는 한편 물밑에서는 이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정점에 둔 경영권 승계 작업이 진행됐다. 이재용 시대의 도래였다.
그룹 지배구조에도 빠른 시간 내에 엄청난 변화가 뒤따랐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전자 계열사들이 속속 재편됐다. 한화에 정유·화학과 방산을 넘기는 빅딜도 이어졌다. 버릴 것은 과감히 정리했다. 얽히고 분산된 사업을 한 곳으로 모아 경영 효율성도 도모했다. 그러는 사이 순환출자고리는 단순하게 축소됐다.
재계는 이 부회장이 그룹의 양대 축인 전자와 금융을,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호텔과 건설을,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이 패션과 광고를 나눠갖는 방식의 밑그림을 그렸다. 최근 삼성전자가 2조원이 넘는 자사주 매입을 단행하고, 이 부회장이 본인 지분이 전혀 없던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지분을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시나리오'는 '현실'로 조금씩 옮겨졌다.
특히 삼성이 그간 상장계획을 전면 부인하던 두 곳이 증시에 전격 상장되면서 시장이 요동쳤다. 11월에 삼성SDS가, 12월에는 그룹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제일모직(옛 에버랜드)이 시장에 공개되면서 이 부회장은 막대한 상장 차익을 거두게 됐다. 상속세 마련을 위한 창구였다. 이 부회장은 세계 100대, 국내에서는 아버지에 이어 제2의 주식 부호가 됐다.
이 회장의 입원이 장기화된 사이 이 부회장은 그룹을 대표하는 최고경영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갔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영향은 컸다.
삼성은 이 회장이 쓰러진 지 나흘 만에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백혈병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을 약속하는 전향적 태도를 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7년 논란 이후 줄곧 원론적 자세를 유지하던 삼성이 그간의 입장을 뒤바꾼 데는 이재용 체제 출범을 위한 묵은 과제 해결 차원이라는 게 지배적 해석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백혈병 논란과 함께 삼성전자를 괴롭히던 삼성전자서비스 위장도급 논란도 협력사 노사의 단체협약 협상 타결로 해결의 길을 찾았다. 여론의 질타를 받던 두 문제를 선제 해결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삼성전자는 큰 부담을 덜게 됐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유산을 둘러싸고 법정까지 갔던 CJ그룹과의 갈등도 해빙기로 전환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범삼성가 일원이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해 화제가 됐다. 이 부회장의 이름도 탄원서에 올랐다.
대외적인 행보 역시 '광폭'으로 불릴 만큼 빠르고 다양하게 이어졌다.
팀 쿡 애플 CEO와의 직접 담판을 통해 지난 8월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애플의 특허소송 철회라는 성과를 이끌어 냈고,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베트남의 최고권력자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 등 해외 정상들과 만나 삼성의 전진기지 수립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건희 회장의 그늘은 짙다.
스마트폰 이후 마땅한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데다, 연말에 이 부회장 주도로 처음 단행된 사장단 및 임원인사와 그룹 조직개편에서는 한계 돌파를 위한 대대적인 혁신보다는 안정을 택한 모습이 역력했다. 아버지이자 1인자에 대한 경계와 부담은 스스로를 움츠려 들게 했다는 지적이다.
이건희 시대의 끝은 이재용 시대의 개막과 맞닿아 있다. 이건희 시대를 뛰어넘느냐, 아니면 퇴행하느냐에 따라 이재용 개인에 대한 평가는 물론 삼성 전체와 국가경제의 명운이 달렸다. 삼성이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삼성그룹 2014년 신년하례식 모습.(사진=뉴스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