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계열사 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1월31일 오후 선고 공판을 받기위해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News1
[뉴스토마토 양지윤기자] 정치권이 기업인에 대한 가석방 필요성의 재점화에 나선 가운데, 최태원·최재원 형제가 수장으로 있는 SK그룹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6일 현재 수감 중이면서 가석방 요건을 충족한 기업인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그의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 총 3명이다. 이 가운데 단연 주목받는 이는 유일한 총수인 최태원 회장이다.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재판이 진행 중이며,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는 징역 4년이 확정됐지만 건강문제로 형집행이 정지됐다.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은 징역 3년이 확정된 가운데, 수감생활이 309일에 불과해 가석방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내년 1월이면 만 2년 복역을 맞는 최태원 회장은 역대 재벌 총수 중 최장기간 수감 중이다. 그는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지난해 1월말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날 현재 수감기간이 695일로, 형법에서 정한 가석방 요건 3분의 1은 이미 달성해 가석방 요건은 충족했다.
정치권은 최근 들어 다시 기업인의 가석방 필요성을 강하게 언급하면서 최 회장의 가석방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24일 기자들과 만나 "(형기를) 살 만큼 산 사람들은 나와서 경제를 살리는 데 나서라는 차원에서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사면이든 가석방이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청와대에 전달할 생각도 있다"고 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내각에서 힘을 싣고 있다. 이미 청와대에도 관련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힌 최 부총리 역시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기업인들의 가석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일반인도 일정 형기를 채우면 가석방을 해주는데 기업인이라고 예외를 둬서는 안 된다"며 형평성 문제까지 제기하고 나섰다. 최 부총리는 과거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인들의 가석방과 사면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야당 사정은 좀 복잡하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5일 기자단 오찬에서 "기업인을 우대하는 것도 나쁘지만 불이익을 주는 것도 안 된다"며 기업인 역차별 문제를 거론, 정부와 여당 입장에 동조했다. 같은 당 소속의 이석현 국회부의장도 "법정요건에 맞다면 법무부의 기업인 가석방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야당 내 기류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특히 최근 '땅콩 회항' 사건으로 재벌에 대한 여론의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이어서 앞장서서 매를 맞을 필요는 없다는 신중론을 견지하고 있다.
가석방 권한을 갖고 있는 법무부는 원칙론을 강조하며 청와대 눈치를 보는 상황. 황교안 법무장관은 이날 국회 법사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기업인 수감자 가석방 문제에 대해 "원칙대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가 가석방 문제는 법무부장관 권한이라며, 사실상 책임론에서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이면서 수순밟기라는 해석이 힘을 얻게 됐다.
이에 대해 SK그룹은 표면적으로는 말을 아끼면서도 속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여타 총수들과 달리 모범적 수감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사회적기업 관련해 옥중저서까지 펴내며 정부와 여론의 호의적 시선을 이끄는 데 주력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황제면회가 불거지며 유탄을 맞기는 했지만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에 적극 지원하며 간절한 바람을 이어가고 있다.
한 관계자는 "9월 이후 여러 차례 기업인 가석방과 사면에 대한 논의가 나왔지만, 최 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히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가석방과 관련해선 언급할 게 없다"고 말했다. 혹여나 여론의 역풍을 맞을까 조심하는 기류다. 하지만 대다수 관계자들은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 같냐"며 정치권 동향과 여론 살피기에 주력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에 대한 가석방의 필요성을 적극 뒷받침하고 있다. SK그룹이 투자와 고용 등에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최 회장의 장기 공백 때문이라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최 회장의 가석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SK그룹은 지난해 초 최 회장 구속 이후 STX에너지와 경비업체 ADT캡스 인수를 검토했다가 막판에 포기했다. 올 초에는 SK에너지를 통해 호주 유나이티드페트롤리엄(UP) 지분을 인수하려던 계획도 접었다. 투자 등 경영사항 전반을 총수 1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국내 기업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지난달 기자와 만나 "최태원 회장의 경영공백으로 투자와 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면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노력해도 메워지는 부분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또한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최근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으로 재벌총수 일가를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이 극히 냉랭해졌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도 정부에게는 부담이다. 결국 여론이 관건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청와대가 이날 가석방은 법무부 소관이라고 책임론에서 비켜가는 모습을 보인 점은 SK그룹으로서는 희망이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3.1절 또는 대통령 취임 2주년을 가석방의 적기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