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런 기억이 최소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배운 어떤 것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의 뿌리에 깊이 박혀 남아 있는 것 같은 경험 말이다.
나 역시 그렇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초등학생 시절의 은사님이 있다. 그는 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6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받은, 담임선생님의 성함이 적힌 종이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도 무섭기로 악명 높은 ‘그분’이었기 때문이다.
3학년 때 실과 선생님으로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 소문만이 아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누구나 추억 속에 한 명씩은 있는, 지나가다 얼굴만 마주쳐도 덜덜 떠는 그런 존재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막상 6학년의 기간 동안, 오히려 여러 가지로 선생님께 배운 것이 많았다. 그분이 강조했던 것 중 하나는, 으레 나올법한 ‘공부’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critical age’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셨다. 배움은 그것을 위한 어떤 특정한 시기가 정해져있으며,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또한, 그 ‘크리티컬 에이지’가 바로 “지금 너희들(초6)”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배움이란 건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되니, 지금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이상하리만치 그 선생님에게서 배운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여러 단어들(이를테면 ‘크리티컬 에이지’가 그중 하나다)은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으니, 퍽 신기하다.
내가 그 선생님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건 단순히 그분이 무섭거나 학업을 강조해서가 아니다. 이를테면 지금도 수시로 내 무의식으로부터 불리곤 하는, 다음과 같은 일들도 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다짜고짜 반 아이들의 눈을 감게 한 후 “돈이 목적이라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라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별생각 없이 손을 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당시 그 어린아이들 중 얼마나 그 말뜻을 이해했으랴.
그런 후, 선생님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셨다. 한번 화내면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었기에 당시 호통의 찌릿함을 매질로 하여, ‘돈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으로 삼아선 안 된다.’ 라는 그 말이 내 대뇌 피질에 끈끈히 자리 잡게 되었다.
글을 쓰며 되돌아보니, 어쩌면 그 ‘크리티컬 에이지’에 배운 가르침이 은연중에 자리 잡아 현재의 내 가치관을 형성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난 그렇게 ‘가치관’을 조기교육받았던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샌가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사회적으로’ 그 크리티컬 에이지는 앞당겨진 듯 했다. 그 시기(age)는 중학교를 넘어 초등학교, 유치원으로까지 앞당겨졌다. 한동안은 외국어는 어릴 때 익혀야 모국어와 같이 쓸 수 있다는 둥 영어 조기교육으로 시끄러웠더랬다.
당시엔 조기교육이 겉으로라도 높은 학업 성취를 위한다는 탈을 썼지만, 요즘에 와선 그것의 성질이 조금 바뀐 것 같다. 요즘 세대에선 기껏해야 4~5세의 유아들이 ‘크리티컬 에이지’에 체화하는 것이라곤, 그저 무(無)내용하며 얄짤없는 경쟁의 세계뿐이다.
요즘 그 경쟁의 이름은 ‘유치원 대란’, ‘어린이집 대란’ 이다. 우리들에겐 전혀 특별할 것 없었던 유치원이, 그들에겐 ‘중복지원’, ‘눈치작전’과 같은 마치 대학 입시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오고 가는 치열한 전쟁터인 것이다.
시설과 교육의 질이 높으면서도 비용은 현저히 적은 국공립 유치원의 수는 터무니없이 부족한데, 그마저 군 별로 중복지원을 할 수 없게 만든 정책 덕분이다. 유치원의 추첨일에 학부모와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결과를 기다리다가, 결국 탈락한 부모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이라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향한 걱정을 본능적으로 읽는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 그 과정에 무의식 속에서 쌓인 관념들은 아이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교육과 경쟁과 낙마를 걱정하는 환경에 놓이는 것은, 그들 말마따나 ‘멋모르는’ 아이들에겐 과한 짐이다. 우리는 어째서, 그 어린아이들의 삶의 첫걸음에서도 경쟁을 조기교육해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기본적인 수요와 공급 파악조차도 하지 않은데다 십여 년을 말로만 하며 미루던 ‘유보통합’의 결과물이다. 또 무상보육이라는 공약 파기로 더 뼈아프다. 더 이상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외칠 게 아니라, 결혼하여 아이와 행복하게 생활할 여건을 만들어야 하는 게 맞다.
지나치게 앞당겨진 ‘크리티컬 에이지’ 덕분에, 후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천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뇌 피질에 새겨질 그 무엇이 ‘경쟁’이란 단어일까 안쓰럽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