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변호사 "국정원·경찰도 과거 반성..검찰은 왜 안 하나"

김 변호사 "반성해야 할 곳이 오히려 수사"
前조사관 "상임위원, 조사 결과 나와야 내용 알아"

입력 : 2015-01-23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한광범기자] 김형태(59·사법연수원 13기)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창립 멤버이다.
 
지난 1988년 민변 창립 당시 홍보간사를 맡았다. 과거 천주교 인권위원장을 맡았던 인권 변호사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 송두율(71) 교수 사건, PD수첩 광우병 보도 사건 등을 변론했다. 2012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특별검사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 검찰의 수사 선상에 올라있다. 검찰은 김 변호사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의 대표적 조작 사건이었던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을 변호한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유신 헌법을 통과시킨 후에 일어난 대표적인 조작 사건이다. 군사정권은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이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5월 군사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가 있다며 서도원(당시 53세)씨 등 23명을 잡아들였다. 다음해인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서 씨 등 8명에게 사형, 나머지 인사들 중 7명에게는 무기징역, 8명에게는 징역 15~20년을 선고했다.
 
군사정권은 사형 선고 후 18시간만인 4월9일 새벽 서 씨 등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CJ)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며 군사정권의 행태를 규탄했다.
 
◇수임료 소송가액 '1%'..평균은 10~15%
 
대법원은 지난 2011년 1월 인혁당 조작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던 피해자와 유족 6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배상금 235억 원에 이자 14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 변호사는 인혁당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수임하며, 수임료로 소송가액의 1%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통상 과거사 사건의 변호사 수임료는 10~15%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등 과거사 피해 단체 회원들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수사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의문사·과거사 위원회에서 활동한 민변 소속 변호사들의 과거사 관련사건 수임을 검찰이 수사하는 것에 대해 표적 수사라고 주장했다.ⓒNews1
 
인혁당 사건 피해자 모임인 4.9 통일평화재단의 한 관계자는 "당시 우리는 변호사님들에게 수임료를 더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분들이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김 변호사들을 비롯한 당시 사건 변호사 3명은 수임료를 적게 받는 대신, 배상금 중 일부가 4.9 재단 건립에 쓰이길 희망하며 수임료를 1%로 결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인혁당 관련 의문사에 대해 직권 조사 개시 결정을 내릴 당시, 김 변호사가 제1상임위원(별정직 1급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만큼 '공무원·조정위원 또는 중재인으로서 직무상 취급하거나 취급하게 된 사건'에 대한 수임을 금지한 변호사법 31조를 어겼다고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현재 김 변호사를 비롯해 7명의 변호사들이 '수임 제한' 규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올라가있다. 과거사 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김 변호사도 "과거 조작 사건에 대해 국정원, 경찰 등도 사과 입장을 낸 적이 있다. 그런데 유독 검찰만 과거를 반성하지 않았다. 그런 검찰이 과거사 위원들을 조사하려고 한다"고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인혁당 사건 조사, 사표낸 뒤 착수"
 
의문사위가 활동 종료 후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의문사위는 2001년 3월 17일 장석구(당시 48세)씨 의문사 사건에 대해 직권으로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장 씨는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이성재(89)씨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1974년 6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후, 다음 해인 1975년 10월 옥중에서 사망했다. 장 씨 사건은 인혁당 사건 조사의 단초가 됐다.
 
◇검찰의 과거사 사건 수임 수사가 민변 소속 변호사들에 대한 표적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검찰의 수사 선상에 오른 변호사 7명 중 6명이 민변 소속으로 알려졌다. ⓒNews1
 
보고서는 김 변호사의 상임위원 재직 기간을 2000년 10월 17일부터 2002년 3월 18일로 기록했다. 김 변호사는 당시 위원회 내부 갈등으로 2001년 12월 중순부터 업무를 하지 않았고, 2001년 1월 중순에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김 변호사의 사표를 두 달이 지나서야 수리했다. 검찰의 주장대로 조사 개시 이후 짧게는 9개월여 간의 기간이 겹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장 씨 의문사 사건이 인혁당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혁당 사건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의문사위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결정한 것은 2002년 1월의 일이고, 당시 위원회가 이를 결정할 때 자신은 이미 사표를 제출한 상태여서 업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입장이다.
 
◇"'장석구 의문사' 조사 관여도 안해"
 
아울러 장석구씨 의문사 사건의 경우도 상임위원으로서 조사 개시에만 참여했을 뿐, 상임위원은 실제 조사에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조사 상황까지 상임위원이 취급한 걸로 볼지 여부가 쟁점이라면서 이 경우 '취급'의 범위가 너무 확대된다고 덧붙였다.
 
의문사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한 인사도 "상임위원은 조사가 진행 중인 사건의 내용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고 김 변호사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는 "상임위원에게 조사에 대해 지시를 받거나 보고를 하지 않았다. 상임위원들은 조사가 끝난 후 그 결과를 보고받은 뒤, 기각이나 인용 여부 등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조사관이 결과를 보고할 때, 상임위원이 아니었다면 관여했다고 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의문사위는 2001년 3월 장석구씨 의문사 사건 조사 개시 후, 국방부·국정원·경찰의 비협조로 자료 확보에 애를 먹었다. 보고서에도 "관계기관으로부터 자료를 제출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의문사위는 같은 해 10월이 돼서야 순차적으로 과거 수사 자료 등을 제출 받을 수 있었다.
 
자료 검토를 통해 의문사위는 2002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조사를 결정했고, 같은 해 9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이후 2004년 11월 출범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가 인혁당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했고, 1년여의 조사 뒤 2005년 12월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법원은 같은 달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2007년 1월 무죄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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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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