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박근혜 정부가 개혁정책을 놓고 '갈 지(之)자' 행보를 거듭하는 모양새다. 증세 논란을 불붙인 연말정산 파동 이후 최근에는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안까지 백지화했다.
문제는 이런 게 한두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만 봐도 종교인 과세를 없던 일로 했고, 군인·사학연금 개혁은 하루 만에 정책 혼선이었다며 말을 바꿨다. 공공요금 인상안 철회, 무상보육 백지화 등 박 대통령 취임 후부터의 행보를 따지면 수는 더 늘어난다.
요즘의 갈 지자 행보를 놓고 정부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내년 총선을 대비해 여론을 살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건보료 개편에 반발할 고소득자와 종교인, 군인, 교직 공무원 등은 대부분 현 정부의 주요 지지층인데 이들에 불리한 개혁정책은 모두 백지화 수순을 밟은 탓이다.
◇청와대 ⓒNews1
29일 국회와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지난 28일 서울시 마포구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찾아 "올해 중에 건보료 부과체계를 개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가 기획단까지 꾸려 1년 반 동안 작업한 개편안을 스스로 포기한 것.
정부의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은 건보료를 소득중심으로 물려 저소득층의 보험료 부담을 낮추고 고소득자의 부담은 높이는 게 핵심이다. 이에 정부가 건보료 개편안을 백지화시킨 것은 연말정산 파동 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한 가운데 정부의 주요 지지층인 고소득자까지 등을 돌릴까 우려해 내린 판단이라는 설명이 힘을 얻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는 "건보료 체계 개편안 백지화는 불합리한 제도의 피해자인 저소득층은 버리고 고소득자의 반발만 의식해 개혁정책을 뒤집은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번 일이 지금까지 정부가 각종 개혁안을 후퇴시키며 보인 모습들과 그대로 겹친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국회와 정부와 종교인의 반발을 의식해 종교인 과세안을 철회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국회와 정부는 올해부터 종교인의 소득 중 80%는 종교 활동비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주민세 등의 명목으로 걷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추진했었다.
2012년 기준 전국의 직업 종교인은 38만여명으로, 지금까지 이들은 소득세를 한푼도 안 냈었다. 이에 종교인에 과세하면 서민증세 없이도 재정부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고, 정부는 지난해 9월에 이런 내용이 담긴 소득세법 개정안까지 마련했다.
하지만 개신교 등 종교계의 반발로 '소득세 원천징수'는 '자진 신고·납부'로 바뀌고 일부 세목을 변경한 수정안이 국회에 최종 제출됐다. 하지만 이 수정안 마저도 38만 종교인의 심기를 건드려 혹시라도 선거 때 표를 잃을까 우려한 국회와 정부는 처리를 유예해 버렸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사진=기획재정부)
군인·사학연금 개혁이 철회된 과정도 이같은 갈 지자 개혁 정책의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군인·사학연금 개혁은 정부가 지난해 말 낸 2015년도 경제정책 방향에 명시된 것. 기재부는 올해 6월과 10월에 각각 개혁안을 마련하겠다면서 공무원연금 개혁에 이은 제2의 공적연금 개혁을 예고했다.
그러나 정부는 군인·사학연금 개혁안을 꺼낸 지 하루 만에 이를 백지화했다. 새누리당에서 "군인·사학연금 개혁은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고 어떤 관련 작업도 하고 있지 않다"고 반발하자 깜짝 놀란 정부가 군인·사학연금 개혁 방침을 없던 일로 한 것이다.
군인·사학연금 개혁안 철회에 대해서도 군인과 교직 공무원의 지지 이탈을 우려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뜩이나 공무원연금개혁을 추진하며 100만명의 공무원을 적으로 돌린 마당에 자칫 군인과 교직 공무원이 표까지 잃을까 알아서 몸을 사렸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정부가 내년 총선을 의식해 불과 2달 동안 서너건의 개혁정책을 뒤집으면서 정부 스스로 개혁정책에 대한 명분을 훼손하고 정책에 불신만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앞으로 정부는 공무원연금 개혁과 지방재정 시스템 개편, 보육·교육정책 개선, 노동시장 개혁 등을 추진해야 하는데 이미 여론 눈치 보기로 갈 지자 정책 행보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마당에 다른 개혁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기 쉽지 않으리라는 설명이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관계자는 "정부가 종교인 과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연말정산 파동 때 촉발된 서민증세 논란도 어느 정도 진화가 됐을 것"이라며 "한 계층의 눈치를 보느라 개혁정책을 후퇴시키면 다른 계층에 대해서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정부의 불신만 커져 정책 자체가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