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관료 출신의 대기업 사외이사 진출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사외이사 제도는 전문성과 경륜을 바탕으로 경영진의 독주를 견제하는 장치로 마련됐지만 정작 현실은 딴판이다. 그간 사외이사로 선임된 관료 출신들의 면면을 보면 사실상 방패막이 역할을 기대한 영입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업이 처한 상황 또한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올해 기업들이 공시한 주주총회 개최 및 사외이사 선임안건을 봐도 이런 흐름은 확인된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특히 사정기관 관료출신이 많다. 현대차는 오는 13일 주총에서 이동규 전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과 이병국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촌세무법인 회장)을 각각 사외이사와 감사로 신규선임하기로 했다.
또 현대글로비스는 김준규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이동훈 전 공정위 사무처장, 석호영 전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지원국장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고, 기아차도 이귀남 전 법무부장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공교롭게도 당대를 함께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같은 그룹의 계열사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하게 된다.
최근 일감몰아주기와 관련한 공정위 규제가 강화되고, 국세청의 과세기준도 깐깐해진 터라 이들의 영입은 눈길을 끈다. 같은 내용으로 주목받고 있는 SK그룹의 SK C&C도 이번 주총에서 하금열 전 대통령실장과 함께 주순식 전 공정위 상임위원을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LG전자도 홍만표 전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검사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하면서 법조인력을 보강했다. LG전자는 삼성전자와 끊임없이 송사를 이어가고 있고, 최근에는 삼성전자 세탁기 파손혐의와 관련해 조성진 사장이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다. 홍 전 검사장은 LG전자와 함께 계열인 레드캡투어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레드캡투어 대주주이자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6촌 동생인 구본호씨는 최근 횡령혐의로 피소된 상황이다.
두산그룹은 좀 더 과감하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이번에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현 경총 회장), 김대기 전 대통령 정책실장을 무더기로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모두 이명박 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관료들이다. 여기에다 두산중공업은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시장에서는 두산그룹의 공격적 행동에 혀를 내두른다.
정유와 석유화학업계의 사외이사도 만만치 않은 명함을 보유하고 있다. 에쓰오일이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고, SK이노베이션은 두산인프라코어와 함께 김대기 전 대통령 정책실장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한다. SK이노베이션은 이미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
주총시즌 때마다 반복되는 관료들의 사외이사 진출은 올해가 사실상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 9월이면 공직자의 부정청탁을 차단하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관료출신들의 역할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재계 관계자는 "아직 김영란법의 효력에 대해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법이 시행되면 로비 자체가 쉽지 않아지기 때문에 기업의 입장에서는 관료출신들을 더 이상 방패막이로 활용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14일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양재사옥에서 진행된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제46기 정기주주총회' 모습.ⓒNew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