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 잡힌 사람

입력 : 2015-03-27 오후 12:50:00
오늘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교수는 강의하다 말고 난데없이, “동성애는 대체 왜 하는지!”라며 툴툴거린다. 옆길을 자주 찾는 그의 수업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너무 나갔다. 그럼에도 아무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갸우뚱하지도 않는다. 학교라는 데는 진짜 따분하다. 딴생각만 하고 앉았을지언정 출석은 꼭 하는 나, 한 마리의 ‘낙타’이다.
 
C와 함께 도서관에서 P를 기다렸다. 배우가 되고 싶은 P와 삼성맨이 되고 싶은 C, 우린 밥을 다 먹고 으레 카페로 간다. 사내 셋이 앉아 떠드는데, 늘 같은 소재다. 여자 아니면 영화. 소개팅 한 사람과 분위기 좋다는 C. 늦은 오후에 오디션을 본다는 P. 대화는 곧잘 끊기곤 하는데, 옆에 예쁜 사람이 지나가거나 앉을 때가 그렇다. 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목소리로―우리 생각일 뿐이다―쓰잘머리 없는 품평을 한다. (아이고, 의미 없다!)
 
삶을 한번 돌이켜보고, 내다보자. 대개 사람은 의미 없는 말을 또 다시 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누구도 그런 반복을 원하지는 않음에도, 반복은 반복한다. 어쩌면 이게 삶이란 것의 형식일는지도 모른다.
 
‘아, 사람이 영원히 되돌아오다니! 왜소한 사람 또한 영원히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다니!’ … 더없이 위대한 자조차도 너무나 왜소했으니! 이것이 사람에 대한 나의 염오였다! 그리고 더없이 왜소한 자들의 영원한 되돌아옴! 이것이 모든 현존재에 대한 나의 염오였다! 아, 역겁다! 역겹다! 역겹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2절
 
얘깃거리를 슬슬 영화로 바꾼다. P는 물론 C도 영화를 좋아한다. 애초 영화판을 구르고 싶은 C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막았다. 아무튼 작년 말 개봉해서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지적인 헌사”라는 평을 들은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이하 실스마리아)로 운을 뗀다. 프랑스의 명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는 제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을 데리고 알프스의 작은 마을로 간다. 배우로서 명성을 안겨준 연극 대사 연습을 하려, 그 연극이 태어난 실스마리아로.
 
◇마리아와 발렌틴,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갈무리
 
1881년 여름, 니체는 실스마리아에 있었다. “나(니체)는 실바플라나 호수의 숲을 걷고 있었다. 수를레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옆에 나는 멈추어 섰다.” 그가 스스로 전 유럽적 사건이라 부른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떠올린 것이다.
 
◇말로야 스네이크 현상,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갈무리
 
<실스마리아>가 담아낸 말로야 스네이크, 이 스펙터클 앞에서 영원회귀를 떠올리는 니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사상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담았다. 이 책으로써, 니체는 그의 사상 전반을 담갔다. 엎친 취업 준비, 삼성맨 되는 데 필요하다는 IT 공부까지 덮친 C. (영문과에서) 드문 배우의 길을 가다보니 “마음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잘 없다”는 P. 그 둘에게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276절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말하는 정신승리(현실부정)를 전하려는 게 아니다. 니체의 긍정은 운명애(Amor Fati). C를 비롯한 청년이 일할 자리를 못 찾는 마당에 기업은 일자리를 줄이고, 캄캄한 앞길을 P 혼자 가는 꼴인 판에, 어떻게 그들에게 긍정을 말할까. 니체는 건강을 잃고, 친구(파울 레)와 여자(루 살로메)로부터 배신당하고, 이 책을 썼다. 그런 그가 말한 긍정, 그 말이 나오기까지 경로(초인, 권력의지, 영원회귀)를 훑어보자.
 
◇니체
 
초인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초인이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베푸는 덕에 대하여’ 中
 
둘 중 앞 문장이 유난히 유명하지만, 뒤 문장이 요지다. 신은 죽었고 그가 앉던 자리는 비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신의 뜻이자 그의 계시로 받아들인 세계관이 깨진다. 세계의 뿌리가 뽑힌 자리, 허무하다. 니체는 묻는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가지는 확실한데, 스스로 ‘낙타’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中
 
교수가 (이 자리에 있을지도 모를)누군가의 사랑을 헐뜯는데, 갸우뚱하지 않는 사람. 딴생각이나 하며, 얼른 수업 끝내고 밥이나 먹고 싶은 나. 모두 한 마리의 낙타 아닐까. 사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 카페 근처 본관 앞에 수많은 학생이 보였다.
 
◇상대평가 정책을 비판하며, 집회하는 학생들, 한양대학교 인문대학 부학생회장 제공
 
학교는 학생 서로 경쟁하길 바란다. 누군가 정한 답을 빨리 찾는 학생이 살아남는 상대평가로써, 학교는 평가의 몫을 학생에게 떠넘긴다. 우수한 학생을 찾아 고무하고, 뒤처진 학생을 격려하는 게, ‘평가’의 본연 아니었나. 니체는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하는 사자가 ‘자유정신’을 가리킨다고 했는데, 학교를 규탄하는 저 학생들이 니체가 말한 사자 아닐까.
 
그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지라도,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는 웃는다. 어린아이는 뭐든 금방 잊는다. 세상이 무너진 양 울고불고하다가, 어느새 새 놀잇감을 찾고 까르르 웃는다. 웃다가 울기, 울다가 웃기를 지치지 않고 되풀이한다. 그에게, 성공과 실패를 가름은 없다. 새로운, 고유한,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한다.
 
“우리는 본래의 우리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 새로운 자, 고유한 자, 비교할 수 없는 자, 자신만의 법칙을 만드는 자,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자!” 상대평가 않고, 지금의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이 되려는 자는 곧 초인이 아닐까. 니체가 말하길,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청춘 영화 <Reality bites>의 한 장면, “네가 돼야 할 건 너 자신이야” 갈무리
 
권력의지
 
“보라, 나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 내가 무엇을 창조하든 그리고 그것을 얼마만큼 사랑하든 나는 곧 내가 창조한 것과 그 창조한 것에 대한 나의 사랑에 대항하는 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기를 나의 의지가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자여, 너마저도 내 의지가 가는 길의 오솔길이며 발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자기 극복에 대하여’ 中
 
공자가 말한 극기(克己, self-control), 자기 제어가 아니지 싶다. 욕망을 억누름으로써 덕을 실현하는 극기와 달리, 권력의지는 ‘나’를 적으로 세워 이기라 다그친다. “만일 인간이 자기 내부에서 오직 자기 존재 유지를 위한 욕구만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너무 소극적인 것이다. 내부의 자아는 팽창하는 힘과 상승과 축적의 경향을 이미 갖고 있다. 현상 유지만 하는 것은 결국 멸망한다. 상승하는 것만 유지된다.” 그 오름의 반복 끝에 초인이 서 있단 걸까. 그런 반복이라면, 긍정해볼 만하지 않을까.
 
영원회귀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가 자서전에 쓴 대로, 영원회귀 사상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이다. 영원회귀는 되풀이하는 삶을 직면토록 해서 두렵다. 니체는 용기를 가지라 일렀다. “용기는, 공격적인 용기는 더없이 뛰어난 살해자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
 
우리 삶의 틀은, 반복인 것 같다. 일상을 돌이켜보고 내다보라.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학생은 학교로 노동자는 일터로 취준생은 도서관으로 간다. 어제 되풀이했고, 오늘도 하고 있고, 내일도 할 것이다. 드문드문하게 일어나는 특별해 보이는 사건들, 큰 틀 안에서 결국 언젠가의 반복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읽은 때는 4년 전쯤. 새내기였고, 이른바 ‘반값등록금 정국’이었다. 들끓는 대학생들, 개중 하나로서 집회에 껴서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도, 마음이 떨렸다. 어서 빨리 50시간이 지나 훈방되기만 기다렸다. 그 시간을 이 책(유치장 안에도 책은 있더라)을 읽으며 보냈다. 2년 뒤 군대에서 다시 펼쳤다.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을 더는 못 보게 된 어느 일병은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생에 다신 없을 걸로 생각한 일들은 머잖아 다시 일어났다. “상대평가 전면 철회!”를 외치는 목소리는, “반값등록금 전면 실현!”의 메아리로 들렸다. 나는 군복을 벗고도, “헤어지지 말자”와 “헤어지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삶이 이렇게 반복할 뿐이라는 영원회귀, 대체 어디서 긍정을 찾는단 말인가. 반복을 마주하는 용기, 이제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영원회귀 앞에서 짓눌리지 않고, “좋다, 한 번 더”라고 외치는 것, 어떤 고통도 어떤 시련도 회피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수락하는 것, 그리하여 매번 영원회귀 자체와 결전을 벌이는 것, 그것이 권력의지다.
 
『즐거운 학문』 제3부 341절
 
고명섭(한겨레 논설위원)의 『니체 극장』에 따르면, ‘권력의지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힘들의 관계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삶을 이끌어가는 무한한 재생의 동력이다.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소멸하지 않고, 꺾인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더 많은 힘을 향한 의지, 그것이 권력의지다. 그리하여 권력의지는 삶의 본질이고 영원회귀는 삶의 형식이다.’
 
우울한 C와 P—아니, 이 시대를 사는 내 나이 또래 모두—에게, ‘긍정’을 권함은 겸연쩍다. 하(몹시) 수상한(뒤숭숭한) 시절이 아니던가. 이 판국에도 참 따분한 학교에서, 그 우울한 표정은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친구들이 “다시 한 번!”이라 외칠 수 있길 바란다. 반복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휩쓸릴 게 아니라, 강한 의지로써 그 반복 위에 설 수 있길 바란다.
 
C는 오늘도 중앙도서관에서 프로그래밍을 골몰한다. P는 집과 학원에서 연기에 몰두한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거다. 그 반복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그 영원할 것만 같은 되풀이를 강한 의지로써, 계속 했으면 한다. 좋은 기자가 되고 싶은 나도, ‘살기 어렵다는 와중에 쉽게 씌어진’ 이 글이 부끄러워 또 다른 쓰기를 되풀이할 거고.
 
하여 니체의 물음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에, 우리 모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서종민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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