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패전 70주년을 앞두고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탈바꿈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지난해 집단자위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헌법 해석을 바꾼 아베 신조 정부는 최근 집단자위권 행사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11개 안보 관련 법률의 제·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같은 법적 정비와 더불어 아베 정부는 방위비 증액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최근 일본 언론들은 내년도 방위예산이 역대 최고액을 기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는 법적인 토대 위에 무기 확충이라는 물리력을 쌓는 것이다.
내년 방위예산에는 자위대에 들어가는 예산이 대부분이지만 미군을 후방지원하는 예산도 포함된다.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한 아베 총리가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예산 부족으로 중국 견제 전략에 어려움을 겪는 미국이 집단자위권 허용과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 일본에 의한 ‘중국 견제 아웃소싱’ 체제를 구축하게 된 셈이다.
지난 2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NHK> 등은 일본 방위성이 2016년 정부 예산안을 편성할 때 방위비를 5조엔(약 47조1710억원) 넘게 반영해 달라는 요구서를 이달 중 재무성에 제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에서는 각 부처가 8월 말까지 다음해 예산요구액을 제출하면 연말 쯤 예산을 확정한다. 신문은 방위예산 요구액이 늘어난 배경에 대해 “안전보장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 자위대가 그동안 할 수 없던 새 임무를 떠맡게 된다”며 특히 신형 공중급유기와 이지스함 등을 도입하기 위한 비용이라고 설명했다.
신형 공중급유기는 자위대의 미군 후방지원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내년 예산안에 처음 반영된다. 이는 안보 관련 법률이 최종 통과되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현행법은 자위대가 미국의 무력행사와 일체화되는 상황을 막고자 발진 중인 전투기에 대한 급유를 금지한다. 그러나 법률이 바뀌면 타국군에 대한 탄약 보급, 발진 준비 중인 전투기에 대한 급유 등과 같은 활동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공중급유기가 필요한 것이다.
최신형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탑재한 이지스함 건조 비용은 2015년도에 이어 내년 예산에서도 계상한다. 또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 외딴 섬 방어에 필요한 수직이착륙 수송기 ‘오스프리’ 등 미군 장비를 도입하는 비용도 예산에 반영된다. <NHK>는 해상자위대가 주변 해역 경계·감시 활동에 동원하는 SH-60K 헬기 17대, 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 등을 도입하는 비용도 예산에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해상자위대가 동중국해 등에서 중국의 잠수함을 추적하는 활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의 방위예산은 고이즈미 정권 시절이던 2002년 4조9392억엔으로 최고액을 기록한 후 10년 연속 감소했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아베 정권이 출범 이후 3년 내리 증가해 올해 예산은 4조9801억엔으로 역대 최고액을 경신했으나, 언론 보도대로 내년 예산이 확정될 경우 다시 최고치를 경신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일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일본 국회에서 심의하고 있는 안보 관련 법률안이 통과될 경우 일본이 미국의 핵미사일을 운반하는 상황도 법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참의원 특별위원회에 출석해 “핵무기 운반도 법조문상으로는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 같은 자리에서 안보 법안이 통과되면 타국군에 미사일을 제공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발언한 바 있는데, 다음날에는 그 미사일이 ‘핵미사일’이어도 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국회 심의 중인 11개 법률 중 중요영향사태법안은 일본의 평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태가 났을 때 군사 행동을 하는 타국군에 후방지원 차원에서 탄약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미사일, 특히 핵미사일도 그 ‘탄약’에 포함된다고 답한 것이다. 안보 관련 법률이 통과되면 군사적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는 일본 야당과 시민사회의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방위상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그의 답변을 들은 하쿠 신쿤 민주당 의원은 “대량살상무기는 (운반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법안에 적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권이 마음대로 법 해석을 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당인 자민당은 야권의 이같은 요구를 무시한 채 참의원 통과를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중국 견제 아웃소싱’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필요와 패전국의 멍에를 벗어야 한다는 일본 우익의 숙원이 결합되어 ‘보통국가 일본’으로 가는 법적·물리적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와중에 아베 총리는 9월 중국 방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동북아가 ‘중국 대 미국·일본’ 대결 구도로 치닫는 상황을 막는 ‘속도조절’ 차원의 외교 행보로 풀이됐다.
그러나 최근 보도를 보면 아베 총리의 9월 방중은 이뤄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반관영 통신 <중국신문망>은 지난 5일 아베 총리가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및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을 피해 방중하더라도 결국은 패전국 정상으로서 중국에 가서 사죄하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방문 계획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왕이 중국 외교부장도 지난 6일 “아베 총리 9월 방중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히로시마 원폭 투하 70주년이었던 지난 6일 히로시마 평화추모공원에서 벌어진 어린이들의 퍼포먼스 장면. 이날 위령제 행사장 부근에서는 집단자위권 관련 11개 법률을 제·개정하려는 아베 총리를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히로시마의 피폭자 단체 대표들도 아베 총리를 만나 법안 철회를 요구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사진/로이터